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전국 매출 최상위권의 행담도 휴게소. 연간 1000만 명이 찾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지만, 휴게소가 세워지기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아픈 역사가 묻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끝까지 투쟁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개발 논리에 의해 수십 년 터전을 일군 섬을 떠나야만 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당진시가 2년의 걸친 연구 끝에 행담도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한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부제 : 구술로 만나는 행담도의 역사)’를 발간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제작에는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협동조합이 참여했다.

터전을 일구고 살던 행담도민들

“행담도는 우리에게 서해안고속도로의 인기 있는 휴게소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섬에도 사람이 살았다. 그곳은 인간의 역사와, 이야기와, 다양한 삶의 욕구와, 감정이 숨 쉬던 삶의 터전이었다.” - 당진시 문화유산팀

뱃길로만 오가던 행담도는 2000년 서해안고속도로 노선이 지나가는 서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육로로 오가는 섬이 됐다. 이 행담섬을 원주민들을 ‘가치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섬에 갇히면 나오지 못한다’(갇히네)라는 뜻으로 주민들은 이해했다고 한다.

실제로 심훈 선생의 수필 <칠월의 바다>에도 가치내가 등장한다. 심훈 선생은 아산만의 작은 섬 ‘가치내’를 찾아간 후 이 수필을 남겼다. 심훈 선생의 수필에는 행담도에서 어려운 삶을 헤쳐 나가는 노파와 그 가족, 잘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에서 조선의 광복과 희망을 보는 심경을 담았다. 그리고 일 년 뒤 다시 그 아이를 만나고 잘 자라는 것을 보며, 상록수처럼 장성해 해방의 희망을 품기도 한다.

행담도에 사람이 늘어난 것은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다. 경기나 인천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행담도 외에 인근 지역에 정착촌을 형성했다. 이중에 일부는 전쟁이 끝나고도 행담도에 남아 터전을 일궜다. 1985년, 당진군 통계 연보에 의하면 총 65명이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교육이나 교통 문제로 인해서 인구가 점점 줄게 된다.

그리고 1990년이 들어서면서 행담도의 위기가 찾아온다. 행담도 개발 계획을 접한 외지인들이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개발 정보에 어두웠던 원주민들이 대거 땅을 팔고 나간다. 또 아산만권 개발 계획 등으로 맨손어업에 대한 보상을 받고 고향을 떠나기도 했다.

계속된 농성, 결국 떠나야 했던 주민들

이 행담도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였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국가에 귀속됐으며, 이후 주민들이 맨손으로 돌을 캐고 나무뿌리를 뽑아 야산을 밭으로 개간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정부는 매년 일정 면적을 주민들에게 불하해 매매했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소유권을 주민에게 넘겨준 것이다. 주민들은 땅을 소유해 콩과 보리, 옥수수 등의 곡식을 일구면서 살았다. 한때는 행담도까지 유람선이 운행되면서 섬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횟집이나 상점이 운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해안고속도로 건설과 충남도와 당진군의 아산공업단지 구역 지정, 아산만권산업단지 개발사업이 시작됐다. 외지인들이 섬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원주민이 땅을 팔지 않으려 하면 시세보다 많은 돈을 주겠다 하면서 팔길 유도했다.

그래도 정부가 국가 소유 땅에 지어준 집과 갯벌,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이곳의 터전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을 주민들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도로공사 측에서는 이 주택이 주민 소유가 아니어서 보상이 불가하다고 말했고, 어업 보상 요구도 아산만 산업단지개발 때 보상했다며 거부한다. 계속된 싸움이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주민이 땅을 팔고 행담도를 떠나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은 주민들은 불침번을 서면서 터전을 지키려는 의지를 불사하기도 했다. 농성은 장기화 되었고, 그 과정에서 주민들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세상에 드러난 행담도의 이야기

그렇게 잊혀질 것 같았던 주민의 이야기가 <그 섬에 사람이 살았네>를 통해 드러났다. 그 시대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책에 담겼다. 그리고 지난 21일 발간식과 상영회가 열렸다. 또한 과거 행담 분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김명중 교사가 자리를 빛내기도 했다.

김명중 교사는 “행담도가 개발이 되면서 연락이 끊긴 주민을 38년만에 다시 만난 것은 큰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길 잃은 행담도민의 숙원사업인 마음의 구심점이 될 안식처가 하나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익주 행담향우회 회장은 “많은 사람이 휴게소로만 생각하는 이곳은 우리가 태어나고 뛰놀던 곳, 그리고 생존의 일터였기에 많은 추억과 애환으로 가슴 쓰리게 아팠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생각이 깊은 분들과 당진시의 ‘사람이 살았던 옛것에 관한 관심’으로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은 행담도 출신에게 큰 감격이고 마음 한편 뿌듯하다”며 “하지만 갈길이 멀기에 사람이 살았던 행담도를 기억해주길 바라고, 그 흔적을 남기는 일에 큰 힘이 되어주길 부탁한다”고 말했다.

한편 주민들은 이들의 기록을 담은 ‘행담도 역사관’을 바라고 있다. 고향을 떠나고, 휴게소가 된 이곳을 쉽사리 지나가지 못했던 주민들. 하지만 이번 사업을 통해 아픔을 들여다보며,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그리고 다시 한번 행담도 역사관을 요구하고 있다.

[주민 · 관계자의 한마디]

남광현 당진시 문화유산팀장

“행담도에 사람이 살았는데, 개발로 인해 이 이야기가 지워지고 잊힌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여전히 행담도민하면 알몸으로 시위하던 모습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 잔상 대신 오늘의 이야기로 행담도를 남길 수 있어 좋습니다.”

이은주 행담도민

“책이 나오고 다큐멘터리가 발표된 것을 보니 흡족합니다. 우리가 행담도에서 살았던 것을 잊었는데, 영상과 책에 함께 했던 동네 사람들의 소식을 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임은순 행담도민

“감사합니다. 영상과 책을 보니 눈물이 났습니다. 옛날 생각이 듭니다.”

한정만 행담도민

“감개무량하죠. 그러면서도 속이 쓰리기도 합니다. 행담도가 개발될 당시, 주민들의 진심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권만을 챙기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때의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염원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를 기억할 수 있는 기념관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서도 조상님을 보았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광현 문화유산팀장, 안라미 국장, 심규상 기자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순자 행담도민

“저는 일찍이 18살에 행담도를 떠났습니다. 주민이면서도 사실 행담도에서 그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습니다. 이번 기회로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 주변도 없는 동생이 이 일을 왜 나서서 하는지 몰랐는데, 알게 되었습니다. 감개무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