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까지 설날은 어제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어릴 적 불렀던 동요 한 소절이 문득 떠오르는 설 명절입니다.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던 시절. 지금처럼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설날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검정 고무신에 포플린 쫄쫄이 바지 하나 얻어 입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설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훨씬 풍요로워졌음에도, 그때만큼의 설렘과 기쁨은 점점 사라진 듯해 아쉬움이 남습니다. 빈익빈 부익부는 더 극명해지고, 감사는 자취를 감춘 채 기형적인 세상 속에서 또 한 번의 설날을 맞이합니다.

이 설날에 남모르게 외로움 속에서 눈물 흘리는 이웃은 없기를 바라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지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콩 한 쪽도 나누어 먹던, 없어도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는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래서인지 2026년은 왠지 모르게 “뭔가 다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고 출발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걸림돌은 제거되고, 되딤돌은 놓아져 막힘없이 길이 열리는 한 해를 바라는 마음일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업으로 살아가는 목사입니다. 바라기는 당진 시민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순조롭게 문제들이 풀려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사회·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어렵다’는 말이 끊이지 않는 요즘을 보면, 상황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성실히 감당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심히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의 작은 도움이 더해질 때, 막혀 있던 문제 하나쯤은 풀릴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작은 나눔은 결코 작지 않은 힘이 됩니다. 당진에서 공무원으로 일했고 정치도 했던 분 중에, 개신교인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로 인연을 맺은 분이 있습니다. 제가 작은 것을 나누면 그분은 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 이건 반드시 어려운 분들에게 나누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늘 부럽습니다. 움켜쥐면 내 것이지만, 손을 펴면 우리 것이 된다는 원리를 몸으로 아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진에 온 지도 어느덧 11년이 되어 갑니다. 송석리의 작은 교회 목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나누려 애써 왔습니다. 그 작은 나눔이 누군가에게는 작은 소망이 되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당진이 더 아름다운 동네가 되기 위해 거창한 영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작은 나눔의 천사들이 많아지면 됩니다. 큰 나눔을 할 수 있는 분은 큰 나눔을, 작은 나눔을 할 수 있는 분은 작은 나눔을 하면 됩니다. 그렇게 모인 작은 나눔은 결국 큰 나눔이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 나눔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은 우강인데, 어린 시절 한센병 환자와 거지들에게 꼭 밥을 나누어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어머니가 하시던 그 일을 제가 이어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 잠언 19장 17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도 작은 나눔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2026년, 당진시대 구독자 여러분도 작은 나눔을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있어서 하는 나눔이 아니라, 할 수 있어서 하는 나눔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일지도 모릅니다.

작은 나눔이 모여 적토마의 힘찬 역동성처럼 2026년 당진에 아름다운 파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