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22일 서울 헌책방(옛책방)에서 [한국영화 측면비사]를 구하였다. 1962년 춘추각에서 나온 290쪽짜리 세로쓰기의 책이다. 지은이는 안종화. 그 당시 약력을 보면 이 이는 서라벌예술대학교수, 서울시문화위원회 영화분과위원, 공보부 영화분과 고문위원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영화배우에다 시나리오 작가에다 영화를 만든 영화감독이기까지 했다.

이 책이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은 행운이다. 지난 책(사료)을 구한다는 것이 발 품과 시간 품을 얼마나 낭비해야 하는지를 아는 나로서는 심훈 선생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던 중에 해후였던 것이다.

작년, 심훈 탄생 100년 때는 그의 초상화(문학사상 표지화)를 구하고 몇몇 논문을 구하기도 했고 그의 영화 세계는 영화평론가 조희문교수(상명대)와의 인터뷰가 큰 수확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화필름이 국내에 없다는 말에 실망이 크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김태현교수의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이 책이 발행된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영화가 들어와 만들어진 지가 40여 년이나 돼 영화인 전체의 총의에 따라 책임을 맡아 40년사를 쓰게 되었는데 초창기로부터 8.15 해방 때까지. 숨겨져 온 여러 이면의 비화들이 고스란히 서술되어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흐름이데 우리 영화가 걸어 온 발자취인 셈이다.

이 책을 통해서 심훈이 만든 영화에 대한 사실이 있는 그대로 정립이 되고, 소설과 시에 가려진(영화 필름이 없는 게 무척 아쉬운 일이지만) 그의 영화 세계가 제대로 해석이 돼 전체적인 심훈의 예술관이 성취되길 기대한다.

심훈에 관한 새로운 확인들

[한국영화 측면비사]를 통해 심훈에 대해 새롭게 눈여겨 볼 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영화 [장한몽]의 후반부 배우로 출연하게 된 동기가 특이하다는 점이다.

2. (계림영화협회 소속 배우가 돼)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영화 촬영법, 연출 수법을 배워온 점

- 이후에 자신이 만든 영화 [먼동이 틀 때]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의 성공적인 흥행의 요소가 되었다.

3. 다영 안석주(조선일보 학예부 기자)와의 절친한 교우 관계였다는 것이다.

4. 심훈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실화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5. 심훈의 술습관(버릇)이 엿보인다.

6. 심훈이 죽기 전 무렵의 사실적인 스케치가 담겨있다.

7. 안종화(이 책의 필자), 심훈, 안석주의 친분 관계가 어떠한지가 농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8. 심훈의 별명이(로이드) 등장한다.

9. 영화 평론-[10년 후의 영화계](잡지 ‘조선영화’에 게재)가 소개되어 있다.

10. 심훈의 무성영화 [먼동이 틀 때]가 1938년 제1회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부문의 ‘베스트 텐’ 중에서 5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11. 영화 [장한몽]의 전반, 후반부의 남주인공 스틸사진(현재 필경사 전시관의 영화사진은 전반부 주인공 사진으로, 그는 심훈이 아니라 일본인 배우 주삼손이다.)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 손 진 동 /

■참고

1. 심훈은 1926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2. 정종화씨가 쓴 (열화당 간행)에는 “심훈이 감독과 각본을 맡은 [먼동이 틀 때]는 이상향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그린 영화로서 [아리랑]과 비견되기도 하는 수작이다. 심훈이 감독한 것은 이 한 작품이지만, 이후에도 그는 시나리오와 영화평론을 쓰는 등 많은 공헌을 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본 지면에 실린 글들은 이 책 좥한국영화 측면비사줝 중 심훈에 관련된 부분을 옮긴 것이다.

심훈의 영화평론 '10년 후의 영화계'

여기서 심훈이 영화잡지 “조선영화”에 실은 [10년 후의 영화계]라는 글을 훑어보기로 한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구들장 밑에서 지진이 터져 전신에 올라 균열이 생기고 사지와 동체가 생이별을 할지도 보장 못할 노릇인데, 아직도 까마득한 10년 후의 영화계를 억지로라도 예언하라는 편집자의 주문이니, 이인이 아닌 나로서는 아니 밴 애 낳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활동사진의 역사가 불과 30년에, 당시의 사람들은 몽상도 못했던 발전과 새로운 경지를 밟고 나아가는 것을 보면, 10년 이후에는 세계 영화계에 어떠한 변동이 생기고, 키네마 자체에도 얼마만한 내부적 또는 본질적으로 그 형식이 바뀌어질는지, 태양과 지구와의 거리를 1밀리미터도 틀림없이 척도하려는 신비스러운 천문학자의 두뇌를 빌지 않고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사진이 움직였다-활동사진이다. 움직이는 그림자의 연속은 무대극의 흉내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영화극이란 이름으로 바뀌고, 제8예술이란 칭호로서 받들어 올리기에 이르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그 그림자에 말이 붙어서 토오키란 것이 발명되고, 발성영화는 무대극과 키네마의 장점과 단점을 한데 뭉쳐 절창보단을 해 가지고 두 가지 예술의 합체된 효과를 나타내게 된 최근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도 개척될 처녀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영화는 다만 평면인 그림자에 지나지 못하나, 앞으로는 입체적으로 물상을 촬영하여 가지고, 폭이 있고 앞뒤에 깊이를 볼 수가 있게 되어, 실물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인물과 자연을, 사람의 눈의 착각을 이용하는 트릭을 쓰지 않고도 훌륭히 구석까지 들여다 볼 수 있게 하고야 말 것이다.

또 한가지는 근자에 발명되어 성행하는 전송사진의 원리를 이용하여 라디오의 방송을 듣듯이 방 안에서 또는 응접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맞은 편 벽에 발성하는 입체영화를 볼 수가 있게 될 것이요 듣게 될 것도 그다지 의아할 것이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일정한 장소인 상설관으로 가서 묻혀 앉아야만 볼 수가 있는 폐단도 없어지고 비싼 입장료도 바칠 필요가 없이 라디오의 광석기나 진공관과 같은 장치만 해 놓고 있으면 한 달에 단돈 1원, 2원의 청취료 또는 간취료만 내고 몇 십명의 가족이 모여 앉아 듣고 볼 수가 있을 것인데 그때에는 촬영소란 그림자도 없어지고 세계의 각 도시에는 무선 입체영화 방송국이 생겨서 감독의 지휘로 직접 배우들이 카메라를 마이크로폰 대신으로 하여 수천만 수백만의 팬에게 방송을 하게 되고야 말 것이다.

앞에 늘어놓은 바와 같이 연극 회화 영화의 희한한 종합체인 무선 입체 발성 천연색 영화가 발명 완성되는 때가 언제냐고 점쳐내기를 나에게 강요한다면, 그 날짜는 내가 예언의 영필을 휘두르고 있는 5월13일 오후 2시 35분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부언해 둘 조건은, 전 인류중에서 1939년 5월12일까지 황천의 아스팔트를 밟을 운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향하여는 마음 놓고 예언을 한다는 것이다.좦(1929.5.13) (113~120쪽)

은막을 등진 익살과 정열

“저 놈의 헬멧, 것 참 그럴 듯해. 우리도 하나 사 쓸까?”

구리개 네거리를 지나가던 청년 서넛이 교통순사의 헬멧을 가리키며 이런 말들을 주고 받았다.

“가만 있거라. 내 저 순사 녀석 모자를 빼앗아 써야겠어.”

“이 사람아. 공연히 창피 당하려구…”

“겁장이는 가만히나 있어. 내가 가서 빼앗아 쓰고 올 테니까.”

겁장이라 핀잔을 받은 사람은 안석주요, 백주에 날치기를 감행하겠다는 청년은 대섭-아니, 심훈이었다. 그 밖의 청년들 일행은 모두 조선일보사의 기자들이었다.

“여보슈!”

교통 정리대 앞에 다다른 심훈은 순사의 궁둥이를 툭툭 쳤다.

“나니까(뭐야)?”

순사는 어리둥절해서 허리를 굽히려 했다. 순간, 훈은 자기의 맥고모자를 벗기가 바쁘게 재빨리 순사의 헬멧을 벗겼다. 그리고는 제 맥고모자를 순사 머리에 씌어주고, 헬멧은 자기 머리에 얹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오이, 오이(야,야)!”

맥고모자를 쓴 교통순사는 훈의 뒤를 쫓느라고 진땀을 뺐다. 훈은 한참 달리다가 아서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쫓아 들어간 순사는 훈과 숨바꼭질을 하다시피 했다. 심훈은 헬멧을 여전히 쓴 채로 요리조리 피하며 좀체로 잡히지를 않았다.

“여보! 당신 도대체 누구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순사도 기가 막혔는지 숨을 할딱거리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나요? 신문기자가 직업이고…”

“흠, 기자니까 이런 장난을 할 수 있지. 그러지 말고 모자나 돌려 주구려.”

“그럼 조건이 있소. 우선 날 안 잡아간다고 약속하시우.”

“좋아, 좋아요.”

“다음엔, 당신 나하고 술 한 잔 나눕시다.”

“허허! 난 그럴 시간이 없는 걸.”

이 정도로 무사했으니 다행이었거니와 장난치고는 참으로 아슬아슬하고도 짓궂은 장난이었다. 아무리 신문기자가 값진 시절이었더라도 공무 집행중인 경찰관을 그토록 곯려 주었으니 말이다.

심훈은 그 즈음에 벌써 영화계에 투신해서 [장한몽]에도 출연했지만 원래 화가이던 다영 안석주는 훨씬 훗날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영화계로 전향해서 [심청전]을 연출했다.

[먼동이 틀 때]를 발표한 후, 심훈은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했다가 한 2년만에 기자생활과 영화 관계 일을 모두 그만두고 충청도 당진으로 내려갔다. 그때 심 훈은 조선일보에 [동방의 애인]을 연재하는 등 문필생활에 들어서고 있었으니 그는 글을 쓸 시간은 고사하고 독서의 여가조차 없는 기자생활에 싫증이 났던 것이다.

당진으로 내려간 그는 시골 초당에 묻혀 본격적인 창작생활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그때 씌어진 것이 문제작 [상록수]였다. [상록수]가 동아일보 현상모집에 당선된 후, 서울에 다시 올라온 심훈은 매일같이 안종화를 찾았다. 그가 별세한 해인 1937년까지( =필자의 오기) 사이에 안종화를 찾아온 장소는 제동에 있는 안종화의 벗 이완기의 집 이층이었다. 그 장소에서 안종화는 작품 창작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쓴 것이 바로 [은하에 흐르는 정열]이었던 것이다.

안종화를 찾아올 때면, 심훈은 언제나 개벽사의 이정호를 동반하곤 했다. 이렇게 셋이 어울리면 세 사람은 으례 계동 입구에 있던 납작집이라는 목로주점에서부터 시작해서 2차 3차의 술추념을 거쳐 정신없이 취해 가지고는 노상에서 고래고래 함성을 지르기가 일쑤였다.

안종화가 심훈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서울거리를 헤멘 날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그날도 납작집에서 납작안주-납작집 독특한, 두부를 납작하게 부친 안주를 씹으면서, 약주로 시작하여 한되 두되 마시는 사이에 어느덧 다섯 집의 술집 순례를 마치고, 그래도 시원치 않아서 훈의 친구네 집에 들려 맥주를 사오래 가지고는 흠뻑 취해서 정신없이 헤어졌는데 그것이 마지막 술추렴일 줄이야.

며칠 후 심훈은 급성 장티푸스로 의전 병원에 입원했다. 말조차 제대로 못하고 앓아 누워 있던 훈은 그래도 찾아온 친구들에게 걱정 말라고 자신 있게 말했으나, 그로부터 수일 후엔 영영 눈을 감고 말았다.

한창 나이인 34세를 일기로(=필자의 오기) 세상을 떠난 대섭. 일본신문 [호오찌]신문을 우리말로 예사로 불러 조선일보사 여기자의 낯을 붉히게 했던 유쾌한 젊은이 심훈. 희극배우 ‘로이드’가 쓰던 테 굵은 안경에 얼굴 생김새마저 '로이드'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로이드’였던 심훈. 남의 주머니를 털어서 외상술을 잘 먹던, 다정다감하고도 호탕한 사나이 심훈. 그가 그렇게 속절없이 요절해 버릴 줄이야 그 누구도 짐작 못할 일이었다. 미인은 박명이라더니, 미남 천재 또한 박명이란 말인가.

2인1역의 진품 [장한몽]

지금은 반도호텔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는 일찍이 붉은 벽돌로 된 한식 기와집이 길다랗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은 본시 봉명학교 교사로 사용되던 곳인데 그 학교가 해산된 후로는 각종 점포가 즐비하니 늘어서게 되었고, 계림영화협회는 바로 이 건물 안방 하나에 간판을 내건 것이었다.

이 계림영화협회에서 이경손이 처음 만든 작품이 [장한몽]이었다. … 중략 …

[장한몽]이라고 하면 선뜻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이수일과 심순애]하면 옳거니 하고 고개를 끄덕이리라. 그처럼 이 [장한몽]은 당시의 영화팬들의 심금을 울려 준 비극물로서 심지어는 [수일과 순애]의 노래까지도 등장하는 판이었던 것이다.

애초에 이경손은 주인공인 이수일역으로 주삼손을 등용했다. … 중략 …

그런데 제작에 착수한 후, 뜻하지 않은 문제거리가 생겼다. 촬영이 거의 반쯤 진행될 무렵, 주삼손이 이렇다 저렇다 말 한마디 없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주연 배우가 도망을 갔으니 촬영은 불가불 중단될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 중략 …

경손은 그렇다고 해서 이미 반이나 촬영한 것을 버리고 새로 촬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후반을 마저 촬영하여 작품을 완성해 놓고 볼 일이었다. 경손은 이래서 삼손 대신으로 주연배우를 한 사람 골라내어야 했다. 그 결과로 등장한 사람이 조선일보사 기자로 있던 심훈이었다. 심훈은 그때 스물 두살의 젊은이였는데 그의 생김새 또한 드물게 보는 미남이었다.

아무튼 이수일역을 맡아달라는 경손의 말에 심훈이 쾌히 응락함으로써 중단되었던 촬영은 그럭 저럭 끝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장한몽]이 어처구니 없는 희비극을 낳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저것 보게. 이수일의 얼굴이 바뀌지 않았어?”

“그러게 말일세. 거 이상한 일도 다 보겠는 걸.”

영화를 보는 관객마다 뜻밖에 바뀌어지는 주인공 얼굴에 모두들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까닭을 모르는 관객들이 이런 말을 수근거리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도 당연했다. 전반의 주인공 얼굴은 주삼손인데, 후반의 주인공 얼굴이 심훈으로 변했으니 은막에 비추어진 이수일의 얼굴이 시종 같은 얼굴로 보였다면 도리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장한몽]은 이래서 관객들의 실소를 안 살 수가 없었으니 때는 1925년, 바야흐로 우리나라 무성영화가 본격적인 궤도 위에 올라서려는 무렵의 일이었던 것이다. (92~94쪽)

심훈과 [먼동이 틀 때]

[장한몽]에 출연함으로써 영화와 인연을 맺은 심훈은 [장한몽]이 완성된 후인 1926년 12월에 강홍식과 더불어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후로 심 훈은 한때 소식이 없었지만 그는 그때 일활촬영소에서 연출법을 배우며 영화계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

다음 해 가을이 되자 단성사 광고벽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이 나붙었다.

계림영화사 작품

먼동이 틀 때

각본·감독 : 심 훈

주연 : 강홍식 신일선

수개월 동안 일활촬영소에서 일본인 감독 무라다 미노루의 지도로 갖가지 새로운 연출 수법을 습득하고 돌아온 심훈이 드디어 자신이 쓴 각본의 메가폰을 든 것이다. 거듭 말할 것도 없이 그와 함께 도일해서 출연까지 한 일이 있는 강홍식과 당시 한창 인기가 높았던 신일선이 주연한 것이요, 촬영은 일본인 기사인 하마다가, 장치는 이승만이 각각 맡았다. 제작을 담당한 계림영화협회는 [장한몽]의 뜻밖의 흥행 부진으로 말마암아 때마침 해산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던 차 일본에서 새로운 영화 기술을 배워 가지고 돌아온 심훈이 각본까지 써 가지고 와서 제작을 종용하므로 사람을 볼 줄 알고 특히 각본에는 조예가 깊은 조일제였던지라 제작을 결심한 것이었다.

[먼동이 틀 때]의 촬영 중에는 재미 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촬영이 거의 끝나려는 무렵, 주연배우 강홍식이 갑자기 행방을 감추어 버린 것이다. 하긴 [장한몽] 때에도 주삼손이 촬영 도중에 없어져 버린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촬영이 절반정도 밖에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심훈과 대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며칠만 있으면 촬영이 끝날 판이었고 보니, 더구나 난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심훈은 그러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사흘 동안이나 강홍식의 행방을 탐지했으나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고민하던 끝에 마침내 강의 호색적인 기질에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곧 당시의 공창가인 신정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아니나다를까, 강홍식은 어느 집 2층 뒷방에 틀어 박혀 일본 창녀와 단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홍식은 평안도 거부의 아들로서 성격이 매우 호탕한 젊은이였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출연하다가 말고 유곽에 틀어 박혀 있었으니 어쨌든 기막힌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 자신으로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심훈으로서야 그 얼마나 괘씸했겠는가.

그러나 촬영은 우선 끝내고 볼 일이었다. 그래서 훈은 할 수 없이 조일제와 상의해서 40원의 유흥비를 치러주고 강홍식을 데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강홍식이 어쩌자고 그런 맹랑한 배짱을 부렸던 것인지는 당사자 아니고서야 그저 알쏭달쏭할 뿐이다.

흐르는 여울 속에서

■처음 개최된 영화제의 이모저모

1938년 11월 26일,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요 최대의 영화제(=제1회 조선일보 영화제)가 열렸다.

…

이 영화제는 조선일보 강당에서 대전시회를 개최하였고, 밤에는 부민관에서 명화감상회를 여는 등 그 규모가 매우 컸다.

한편 이 영화제를 개막하기에 앞서 준비위원들은(=안종화도 포함 됨) 상영이 가능한 45본의 영화(무성영화 33편, 발성영화 12편)를 선정해서 일반 관중으로 하여금 베스트 텐을 투표하도록 했다.

명화감상회에서 베스트 텐으로 꼽힌 영화는 다음과 같다.

무성영화부 베스트 10

1위-아리랑 4,947표

2위-임자 없는 나룻배 3,783표

3위-인생항로 3,075표

4위-춘풍 2,921표

5위-먼동이 틀 때 2,810표

6위-청춘의 십자로 2,175표

7위-세 동무-1,608표

8위-사랑을 찾아서 1,230표

9위-풍운아 1,143표

10위-낙화유수 1,015표

계림영화협회도 최후를 고하고

이렇게 해서 완성된 [먼동이 틀 때]는 개봉 때에 일대 호평을 받았다. 당연한 결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동 촬영이란 것은 자동차에 카메라를 싣고 전진과 후진을 하던 정도여서 완성된 필름을 볼 양이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런데 심 훈은 일본에서 새로운 이동 수법을 습득해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대로 활용했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시도한 것이므로 우선 촬영수법이 성공적이었던 것이다.

또 한가지 특기할 것은 장치가 우수했다는 점이다. 미술가 이승만은 심훈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는 한편 자기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훌륭히 발휘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물론 조일제의 도움이 컸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이렇듯 [먼동이 틀 때]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런 보람도 없이 계림영화협회는 다음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드디어 해산되고 말았다. 먼젓번 작품때의 부채가 많았는데다가 연기자와 기술자들이 뿔뿔이 흩어져버린 때문인 것이다.

심훈은 그후에 장편소설 [직녀성] [영원의 미소], 그리고 [상록수] 등 많은 작품을 연달아 발표함으로써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빛냈지만 애초에 이렇게 영화에 출연도 하고 연출도 하며 은막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