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조현희 학생기자
.선생님, 나의 선생님
우리가, 내가 지냈던 열 넷, 열 다섯, 열 여섯의 중학시절 3년 동안 장수덕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랑에 빠졌고, 어디에서나 제 향을 피울 수 있는 꽃이 되었다. 1학년 4반이었던 나는 매주 첫 시간에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하며 일주일을 시작했다. 월요일 첫 시간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한 주를 시작하지 못했던 날은 꾸중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학원으로 그리고 집으로 쳇바퀴 돌듯 지냈던 나는 선생님과는 수업시간으로밖에 만나지 못한 채 일 년을 보냈다.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2학년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을 한번 더 가르쳐야 하지 않겠니?” 하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는지 2학년 1반 담임을 맡게 되셨다. 2학년이 막 시작되어 모두들 다시금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항상 함께 다니던 친구가 선생님께 반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 친구가 만든 팬클럽에 자연스레 들어가게 되면서 선생님과의 좀더 진한 인연의 끈을 엮어가게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시는 때에 팬클럽이란 명칭이 쑥스럽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이왕에 이렇게 모이게 된 거라면 좋은 일을 함께 해보자고 하셨다.
그 좋은 일이란 선생님이 몇 년 전부터 제자들과 함께 해오고 있는 자원봉사활동이었다. 모두 선생님이 좋아 모인 친구들이었기에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을 통해 봉사활동은 물론이거니와 답사활동을 다니면서 2년이란 시간 동안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배우며 살아갈 것이다.
3년의 중학시절과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봉사를 통해 그리고 스승과 제자의 가장 순수한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지 가르쳐주려 노력하셨던 선생님을 존경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현희야, 넌 역사를 왜 배우는지 알지?”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역사과목을 좋아하지 않았다. 과거에 있었던 일을 지금에 와서 왜 평가하며 배우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현재는 현재일 뿐인데 말이다. 현재에 충실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처음엔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기보다는 그런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어느 과목보다 역사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2학년이 되면서 한시간 더 늘어난 교과시간과 특기적성교육으로 역사탐구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수업을 듣게 되었다. 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배우면서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역사를 통해 우리가 이 자리에 서 있고,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가 바로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방학을 통해 선생님과 함께 했던 답사활동은 그런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해주었다.
“봉사는 베품이 아니라 나눔이란다”
처음 봉사활동을 시작하기 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 준비를 했다. 우리들은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이 들떠 단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이다란 것에만 초점을 두고 그 분들이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때 우리들은 그랬다. 그 결과 모두 1급 장애인이셨던 분들께 오히려 폐를 끼치고 온 하루가 되었다. 가기 전까지 우리가 준비하는 과정을 보며 아무 말씀 없으셨던 선생님께서도 한 말씀 하셨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자기 성찰에 좀더 신경을 써달라고.
무더운 여름날 선생님께서는 한 통의 전화를 받으셨고 안타까운 얼굴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돌아가신 지 일주일이 되어서야 받은 연락이었기에 찾아뵐 수도 없었다. 붉은 장미꽃이 만발했던 여름 병원에서 할머니와의 산책을 끝으로 우리는 저 하늘에서는 편안하시라는 기도를 드리며 할머니를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의 정이 대단했지 싶다. 특기적성시간에 그 얘기를 꺼내신 선생님 때문에 아이들은 금방 울음을 터뜨렸고 선생님도 눈시울을 적시셨다. 만남이란 쉽지만 헤어짐이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슬퍼해 하는 우리들을 보시고는 두 번째 할머니를 소개시켜주셨다. 생각해보니 오복윤 할머니와의 인연도 거의 2년이 다 되어 간다. 쉬는 날이면 찾아가 감자를 함께 심었고, 땅콩이 익으면 땅콩을 캐어 말렸고, 가을날 감이 빨갛게 익으면 망사주머니에 있던 양파를 다 꺼내고 기다란 장대에 달아 감을 따면 할머니께서는 곶감을 만들어주셨다. 비오는 날에 이웃집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비닐하우스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시골 할머니댁에 찾아간 기분으로 모두들 함께 했다. 그것은 봉사가 아닌, 하나의 어우러짐이었고 나눔이었다.
“그릇을 키우도록 노력하자꾸나, 얘들아”
2학년이 끝나가는 겨울 무렵, 열 여섯의 우리들은 작은 문제로 인해 서로 틀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친구와 친구 사이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았고 항상 우리를 돌봐주기만 하셨던 선생님과의 문제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모다 못한 선생님께서는 방과 후 우리들을 불러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작은 그릇에는 무얼 담아도 넘치기 마련이라고. 작은 그릇을 품을 수 있는 큰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후원자가 되어주시겠다던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자신의 잘못을 알았는지 한 명씩 반성의 눈물을 보이더니 끝내는 모두 울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에는 그런 과정이 한번 있어야하는 것이었을까? 그 이후 더 깊은 우정과 사랑으로 우리들은 1년을 지내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내가 고생해서 뭐든지 편해지는 게 있다면 그게 복을 짓는 일이다. 맞지? 앞으로도 우리 그렇게 살자.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편하고 행복한 자들이 있다면 그걸 낙으로 살자. 알았지?”
선생님은 어떠한 일이든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를 주셨고 칭찬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덕에 지금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지 않는가 싶다.
선생님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항상 베풀며 아름답게 사시는 분이셨다. 그 모습이 인생관을 결정하는 시기인 10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혹여 모르시고 계시진 않겠지? 늦은 밤, 선생님의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바로 지금 좀더 노력하고 좀더 희생하고 그리하여 멋진 모습으로 자라나길 바란다는. 그리고 항상 마음의 여유를 잊지 말라는...
■‘www.edu.co.kr/hiswolf’와 ‘daum.net’의 ‘hiswolf’카페에 가면 장수덕 교사와 학생들의 역사장소 답사 및 봉사활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