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재다능했던 식민지시대 모던보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작사 아들이 작곡해

석영(夕影) 안석주. 심훈과 똑같은 1901년 서울생이다. 동갑내기, 그래선지 둘은 무척 가까웠다. 김병익이 쓴 『한국문단사』에는 빙허 현진건, 안석주와 심훈은 당대 3대 미남자로 불릴 만큼 잘 생겨서 기생들의 흠모를 받았다고 한다. 교동보통학교, 휘문고보와 일본 본양양화연구소를 졸업하고 19세 때부터 모교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22년~23년까지 동아일보에 나도향의 첫 장편소설 「환희」 연재의 그림을 그리면서 도향은 일약 천재작가로, 석영은 신문삽화의 선구자로 우뚝 선다.(김을한이 쓴 문고판 『한국신문사화』을 읽다보면 이 시절 동아와 조선의 경쟁이 왜 심했는지 재미있게 나온다. 사실 소설 「임꺽정」도 그래서 태어난 것이고.)

22년엔 홍사용, 이상화, 박영희, 나도향 등과 ‘백조’ 동인이 되고 김복진 김기진 형제와 화가 이승만도 동인에 가세해 함께 활동을 한다. 25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삽화를 그리면서 학예부장을 지낸 뒤에 1928년부터 조선일보로 옮겨 그 신문에 연재되는 삽화는 물론 만화가지도 도맡아 그리게 된다.(심훈과도 동아와 조선일보 근무시기도 비슷하게 같다. 둘은 그렇듯 잘 어울려 다녔다. 조선극장에서 토월회의 제2작품 ‘카추사’에 남주인공으로 분한 석주에게 큰 화환을 들고 안종화와 함께 가기도 했고, 조선일보 시절엔 심훈이 사회부, 그는 학예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운규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해 심금을 울렸던 여배우 신일선이 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도 심훈 감독에 대한 영화 ‘먼동이 틀 때’에 강홍식과 그녀가 출연했는데 새 영화 연출법과 주연 강홍식의 행방불명 에피소드를 전하는데... 안석주는 뒷날인 1929년 1월 단성사에서 재상영에 들어간 ‘먼동이 틀 때’의 영화 인상기도 썼다.)

안석주는 동인지 「백조」의 자매기관인 극단 토월회에서 신극운동을 했고 22년 예술협회의 1회 공연에도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아주 다재다능한 인물로 지금도 우리가 부르는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만든 이가 바로 그이고 아들 안병원(77)이 작곡한 동요이기도 하다. 연극배우, 무대장치 미술가, 서양화가, 미술평론가, 만문만화가, 삽화가, 소설가, 희곡작가, 시나리오 작가... 이렇듯 모든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신간회 간사이기도 했고, 심훈이 ‘먼동이 틀 때’를 만들었다면 그는 영화 ‘심청전’(37년)을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지원병’(41년)이란 친일 영화를 만들어 오명을 남긴다.

만문만화(漫文漫畵). 우리에겐 생소한 말이지만 그때를 풍미한 형식이었다. 석영 안석주의 재기가 능수능란하게 표현된, 일본에서 옮겨온 만화였다. 25년 ‘허풍선이 모험기담’, ‘엉터리’를 시작으로 하다 총독부의 탄압으로 돌파구인 그림과 글이 결합한 만문만화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때 작가들은 최영수, 김규택, 임홍은 정도였고, 일본에선 1913년부터 처음 시작된 것이다. 이 만화는 30년대 신문과 여러 잡지에서 유행되는 풍조를 만들어 식민지 시대와 달라지는 근대 무렵을 생생하게 담아왔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와 심훈이 활보했을 그때 그 시절의 흔적은 책 『모던보이 경성을 거닐다』(현실문화연구)에 잘 분석이 돼 있다. 심훈의 소설에는 1930년 10.29~12.10까지 39회 동안 ‘동방의 애인’에 삽화를, 31년 8.16~ 32년 2.29까지 112회 동안 ‘불사조’에 멋들어지게 그렸으나 일제의 검열에 걸려 연재를 중단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들 소설들은 그가 청년기에 중국 유학시절 항주 지강대학을 수학하며 이때 이동녕, 이시영 등과 교우하는데 이 당시의 생활이 깊게 형상화된 소설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