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동 소설가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여러 종류의 잡지가 나온다. 특히 최남선이 발행했던 ‘동명’은 민족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보급함으로 자주독립의 정신을 앙양하는 조선주의를 제창했던 주간지였다. 천도교에서는 ‘개벽’, 흥사단에선 ‘동광’을 발행했다.

1910년 한일합방 전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일어)와 매일신보, 영어판 서울 프레스의 3개 국어 일간지를 발행했는데, 이후에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가 통합돼 하나의 신문사로 되고 서울 프레스는 독립된 신문사로 남아 신문을 낸다. 합방 후인 8월30일부터 대한매일신보의 ‘대한’을 떼고 매일신보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고 만다.

1915년 이후에 천풍 심우섭과 윤백남(23년 4월 尹白南은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에 여배우 이월화를 여주인공으로 출연시킨다. 역사소설인 ‘대도전’, ‘흑두건’을 남겼다. 6.25전쟁 뒤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을 지냈다) 등이 이 신문사에 입사하게 된다(심우섭은 바로 심훈의 큰형이다).

1910년대의 매일신보 기자들이 대부분 신소설을 집필하는 작가이듯이 둘도 그랬다. 1917년엔 작곡가 홍난파도 입사를 한다. 신문은 당시의 정치기사가 우리나라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가 없기에 학예면 기사에 중점을 뒀다. 이 때는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의 독무대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는 일본 유학 중에 써놓은 「영채」를 다듬어 우리나라 근대 첫 장편소설인 「무정」을 1917년 1월1일부터 6월14일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광수는 이 처녀작으로 일약 작가적 명성을 얻게 됐고 「개척자」를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잇따라 연재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기자 신우선이 나오는데, 그 호탕한 성격의 남자가 바로 ‘천풍 심우섭’을 모델로 삼았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춘원과 같은 시기에 매일신보에 장편소설인 「산중화(山中花)」를 1917년 4월3일부터 9월19일까지 함께 연재한다. 천풍 심우섭은 내놓라 하는 국내 발행 사전 따위에도 언급조차 없다. 그의 정확한 생몰(生沒) 시기도 아직은 미지수. 시간과 함께 뒤적이다보면 호기심이 채워지는 기록이 다가오리라.

최남선이 새 각오로 낸 종합잡지 「청춘」이 1914년 10월에 창간해 여러 분야의 작품을 공모하는데 육당과 춘원의 심사평과 함께 적지 않은 상금이 있어 독자들의 호응이 제법 컸다. 이 잡지에 육당, 춘원은 물론이고 현상윤, 진학문, 심우섭등의 글이 실리면서 잡지 「소년」에 이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는데 18년 15호로 폐간되고 만다.

또 춘원 이광수가 잡지 「청춘」과 매일신보에 쓴 「5도답파여행」은 그가 22세부터 1918년인 독립운동 직전까지 쓴 여행기에 자신의 주장을 담은 글이다. 「5도답파기」는 매일신보의 청탁으로 1917년 6월부터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을 다니며 연재한 것이다. 그의 유려함과 신선함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단다.

이 연재물은 경성일보에서도 요구해서 춘원이 우리말과 일본말로 동시에 쓰게 되었는데 도중에 병을 얻었다. 입원한 뒤에는 목포, 다도해, 경주 등지에서 일본어로 쓴 걸 심우섭이 다시 번역해 자기 신문인 매일신보에 실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이 「5도답파여행기」는 1939년에 「반도강산」으로 영창서관에서 간행된다.

※이 글은 한국신문사화(김을한, 탐구당), 육당이 이 땅에 오신 지 1주년(동명사), 한국언론사(정진석, 나남), 이광수전집(삼중당) 등에서 얻어진 선물이다.

※다음회 심우섭의 신소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