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합덕읍 재오지리 밀양박씨 선산에서 열린 열녀각 기공식 장면
▲ 지난 20일 합덕읍 재오지리 밀양박씨 선산에서 열린 열녀각 기공식 장면

뒤늦게 포창 발견돼 문중서 열녀각 건립 추진 중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내 삶아 바친 열녀의 사연이 뒤늦게 밝혀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일 합덕읍 재오지리 밀양박씨 선산에서는 이 시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한 열녀의 사연을 기리는 조촐한 의식이 열려 관심을 모았다. 열녀각 건립 기공식이 10여명 남짓한 밀양박씨 자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것이다.

열녀의 이름은 홍순희 여사. 이미 78년전 세상을 등진 이 여사는 1902년 유림집안인 면천면 대치리 홍영후씨의 딸로 태어나 열여섯에 합덕 재오지리 밀양박씨 가문인 박준규에게 시집을 왔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어렸을적부터 한센병(나병)에 걸려 몸에 붉은색 딱지가 지는 적반풍을 앓고 있었다. “남편 대신에 이 병을 내가 갖겠다”며 날마다 정안수를 떠놓고 기도를 해도 차도가 없자 의원을 찾아간 그녀는 의원에서도 병을 고칠 방법이 없고 인육이 병구완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와 자신의 오른쪽 다리살을 베어내 삶아서 남편에게 바쳤다는 것이다. 당시 일곱 살이었던 큰딸 박복순씨의 증언에 의하면 1928년 5월20일 밤 어머니 홍여사가 자신의 무릎아래 다릿살을 칼로 베어내 뚝배기에 담아 뒤뜰로 가서 등걸불에 올려놓고 삶아 남편에 진상을 했다. 여사는 살을 베어낸 자신의 다리에 들기름을 바르고 무명천으로 감쌌다고 한다. 아들을 살리려는 며느리의 지극한 행실을 지켜 본 시어머니가 감화돼 동네에 알리게 되었고 면천향교에 이 사연이 전해지면서 그해 6월 유림향약본소에 추천돼 ‘포창 완의문’이 여사에게 내려지기에 이르렀다.

당시 유림향약본소는 암울했던 일제식민지 시대에 많은 유림단체들이 친일로 돌아섰던것과 달리 조선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가장 중요시되던 덕목인 충효를 교육하고 장려하던 곳이었다. 백성 중에 효와 덕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방 유림들로부터 추천을 받아 전국팔도의 대표유사가 참여해 심사하고 실천행이 인정되면 그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각과 비를 세우게 하고 포창 완의문을 내렸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처지에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던 향약본소는 덕행자에게 포창만 내려줘 각과 비를 세우는 것은 포창을 수여받은 가문에서 할일이었다.

밀양박씨 족보에만 기록되어있던 홍윤희 여사의 열녀행실은 향토사 연구가인 박성묵(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 예산거주)씨가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던 ‘포창완의문’을 찾아내고 해석함으로써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홍여사의 유일한 핏줄인 큰딸 박복순 여사의 고증도 채록하기에 이르렀다. 홍여사에게 내려진 ‘포창 완의문’은 을사늑약 직전까지 승선원 좌부승선으로 고종황제를 모셨던 석당 이윤종 선생이  쓴 것으로 1928년 당시 내포지역에서 이 포창을 받은 사람은 홍여사가 유일했다.

박성묵씨는 “포창완의문에 여사의 행실이 상당히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1928년 그해에 포창을 받은 건 당진밖에 없었다”며 “이는 문중의 자랑일뿐만 아니라 당진의 효열정신의 자산으로 당진군 차원에서도 길이 새길만한 업적” 이라고 말했다.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지난 4월15일 홍여사의 효열정신을 기리고 잇고자 열녀각을 건립하기로 뜻을 모으고 6월20일 여사의 생일을 맞아 기공식을 가졌다. 종친회 박홍규 회장과 열녀각건립추진위 박호근위원장은 “구전으로만 전해내려오던 홍여사의 행실이 사료로 고증이 돼 비로소 그 뜻을 널리 알릴 계기가 되었다는데 한없이 기쁘다”면서도 넉넉하지 못한 재정상황을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