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중3 여름방학이었지 싶다.

원두막에서 친구랑 과학 익힘 문제를 풀고 있었다.

머리에 해를 이면, 그림자는 딱 발아래 걸리는 정오. 콩밭 고랑에 다문다문 앉은 수숫대는 졸음에 겨운 두 팔을 억지스레 들고 섰다가 7년 매미 우는 소리에 놀랐던지 한참을 두런두런.

저 만치 두 사람이 수박밭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 아이는 곱슬머리에 까무잡잡하니 플레이보이처럼 보였고 옆에 아이는 뽀얀 얼굴에 금테 안경을 끼고 감색에 흰 줄이 내린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제 밤에 할아버지가 원두막에 계실 때 수박서리를 하다가 붙잡혔고, 용서를 빌려고 온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아이를 정죄할 마음이 아주 없어서 수박 잘 익은 놈으로 골라 내밀었다. 윗마을 할아버지 댁에 놀러 온 그 아이는 대구가 집이라고 했다.

윗마을과 우리 마을의 중간 어디에서 모닥불 피우고 놀았던 그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그 아이가 변성기에 접어든 목소리로 불러주었던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을 내내 불러야 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사흘이 못되어 내려오던 그 아이. 친구에게 보낸 카드 속에 내게 줄 카드를 넣어 보냈던 그 아이.

이듬 해 겨울 그 아이는 내려오지 않았다. 알듯 말듯 카드만 건네 놓고는 말이다.

고2 여름방학. 그 해에도 우리는 수박을 심었다.

동네가 바로 건너 보이는 밭에 원두막을 세웠고, 거짓말처럼 그 아이가 왔다.

처음 그 때처럼 친구와 함께.

고2 겨울방학을 끝으로 다시 보지 못했다. 고3 때 만든 문집에까지만 남아있는 그 아이.

대학에 들어가고 그 아이에게서 몇 통의 편지가 왔지만 답장을 삼켜버렸다. 웃고 지날 일이다.

지금은 먹을 만큼의 수박만 심는다. 원두막도 없다.

지금 생각하니 추석에도 그 아이가 왔었다. 윗마을에 심부름 갈 일이 생기기라도 할라치면 거울 앞에서 한참을 꾸물대곤 했는데 그래봐야 지금보다는 빛나고 맑았을 눈망울밖에 내가 보여줄 게 무어 있었나?

그 아이는 산머루 닮은 내 눈을 기억 해낼까?

추석 가까운 그믐밤에 흐뭇하게 차올라서 서둘러 스러지곤 했던 유년의 기다림. 기다림.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