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강!땅강!땅강!’

쇠 두드리는 소리가 당진시장을 울린다.

“손 씨~ 호미 좀 손 봐줘. 낙지 캘 때 쓸거여~”

“손 사장, 지난번에 주문한 괭이는 다 됐는가~”

“다 되어가는 구만요~ 풍구 좀 돌려봐요~”

30년 전, 장날이면 당진대장간에는 호미며 낫 같은 농기구를 든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지금이야 쇠붙이가 흔해 녹이 슬면 버리고 새 것을 사 쓰지만 무엇이든 귀하던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쓰다가 날이 무뎌진 호미나 낫 같은 쇠붙이 농기구들은 어김없이 대장간행이었다. 장날이면 망태기에 농기구를 담아 오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다. 손이 바쁜 날에는 손님들이 대신 풍구를 돌려주기도 했다. 낡아 제 몫을 다 못했던 호미와 괭이, 낫들도 손창식(60) 씨의 손을 거치면 다시 태어났다. 손 씨는 헌 것을 새것으로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쇠를 녹여 크고 작은 농기구를 만드는 일을 60년 동안 해왔다. 60년 외길 인생을 걸어 온 손 씨는 요즘 부쩍 옛날 그 시절을 멍하니 회상하곤 한다.

“옛날에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쇳 일을 배울 때는 합덕이고 신평이고 장날이면 ‘출장’을 나갔어요. 집에서 만든 호미, 낫, 망치 같은 것들을 들고요. 그 때는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풍구만 불러 다녔지요. 풍구 알아요? 지금은 기계로 쇠를 때리니까 풍구가 필요 없지만 예전에는 숯불을 피워서 쇠를 녹이곤 했어요.”

손 씨 집안은 대대로 대장간을 운영해 왔다. 손 씨와 손 씨의 큰형님은 아버지(故 손양철)에게, 아버지는 할아버지(故 손충영)에게 대장간 일을 배웠다. 고대 대촌리 덤플말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다 당진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 씨가 스무 살 되던 해 쇠를 때리는 기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불에 녹인 쇠를 사람이 커다란 망치로 직접 매질을 해 모양을 만들었다. 실력이 좋은 경력자가 쇠를 잡고 모양을 내는 ‘윗일’을 맡고 망치로 쇠를 때리는 ‘아랫일’은 보조가 했단다.

20~30년 전만해도 사람을 여럿 두고 일했지만 지금은 손 씨 혼자 당진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다. 한보철강이 당진에 들어서면서 ‘아랫일’을 해주던 이들이 모두 직장을 옮겨갔고 농사가 기계화되면서 농기구를 찾는 이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손 씨가 만든 농기구를 찾는 이들이 있다. 기계로 만든 것보다 더 단단하고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주문 제작해 주기 때문이다. 철물점에서도 손 씨가 만든 것들은 더 좋은 값에 사간다고.

“호미만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예요. 당진에서는 주로 바지락을 캐거나 낙지를 잡는 바닷일에 쓰이는 호미가 많이 나가요. 사람에 따라 좋아하는 호미의 휘어짐 정도나 날의 크기 등이 달라요.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만들어 주니까 매번 찾아오죠.”

손 씨는 “쇠도 모두 강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며 “강도마다 쓰임새가 다 다르다”고 말했다. 왜 아니겠는가. 쇠나 사람이나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저마다 자기 쓰임새를 알고 살면 어디를 가서나 제 몫을 하지 않던가.

“용도를 잘못 알고 담금질을 잘 못하면 쉽게 이가 빠지거나 부러져서 제 몫을 다 못해요.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죠.”

지난 세월을 어제 일 마냥 풀어놓던 손 씨의 눈빛이 슬며시 흔들렸다. 손 씨는 대장간을 더 이상 물려줄 이가 없다. 대대로 이어오던 가업이 자신의 손에서 끊기게 됐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코끝이 빨개지고 얼핏 눈물도 비쳤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이제는 손으로 만든 호미며 낫을 찾는 이들이 줄었으니까요. 고된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어쩐지 여기서 가업이 끊긴다는 게 마음이 좋지 않아요. 서글프기도 하고...”

그래도 손 씨는 대장장이로 살아 온 지난 60년 동안 후회해 본 일은 없다. 몇 해 전에는 칼을 만들다 손을 베어 왼쪽 검지손가락 절반을 잃었지만 대장장이니 뭐 그럴 수도 있다는 표정이다. 대장간을 운영하며 두 남매를 잘 키워낸 것도 뿌듯한 일 중 하나다. 다만, 자신을 이어 당진대장간의 불을 지펴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