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만연한 좋지 않은 난감한 정서 중에 위·탈법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고서도 죄책감 없이 뽐내며 과시하고 스스로 희열을 느끼는 현상이 적지 않다. 또 그 삐뚤어진 용감성을 비호하고 호응하며 맞장구치는 것도 그렇게 낯설지 않다. 더구나 원칙을 고수하고 준법정신이 강한 사람을 존경하거나 칭찬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융통성을 내세우며 고지식하다거나 인간성이 메마르다고 답답해한다. 그런데 우리들을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사회적인 큰 사건들의 이면에는 거의 위·탈법이 숨어 있다.

오래전 일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크고 작은 환란들이 끔찍한 교훈이 되고 있지만, 고양이에게 쫓겨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간 쥐가 금방 잊고 되돌아 나와서 잡히듯 집단망각증세 속에서 끊임없이 분노의 뉴스를 생산하고 있다. 일단 일이 터지고 나면 그제야 원인을 따지고 대책을 얘기하지만, 이 또한 용두사미로 흐지부지되고 사고 당사자들은 별의 별사람까지 원망하고 남의 탓으로만 돌리기 일쑤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만연하고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인가. 그 요인의 맨 위에는 삐뚤어진 이기주의와 결과만 중시하는 목적 제일주의가 있다.

나와 내가 포함된 우리 쪽만 생각하고 상대와 저 쪽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첫 번째라면, 빨리 빨리라는 조급증에 중독돼 모든 과정을 생략 무시한 채 오로지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의 목적달성만 염두에 둔 건강하지 못한 의식이 그 두 번째 원인이다.

조급증과 근본을 잊은 그 욕심이 결국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앗아 갈 수 있다는 걸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지난주에 끝난 지방선거에 나온 후보들의 공약을 보노라면 참으로 공포스럽다. 본인들이 그 등용문에 오르기만 하면 무소불위하겠다는 안하무인의 약속이 한둘이 아니다. 진정한 사회발전이 아니라 포퓰리즘으로 포장한 물량적인 것이 주류이고 좀 부족해도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는 내용은 눈을 씻고 봐도 드물다.

거기에다 나랏돈으로 무얼 하겠다는 것은 적정성과 균형의 예술인데 조자룡의 칼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한 위세를 자랑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과대망상증에 관대했는가. 부조리의 온상을 꼭대기부터 발본색원하자는 소위 ‘김영란 법’도 계류에서 깨어나는 듯하더니 또 잠들었다. 도대체 세월호 같은 참사를 얼마나 당해야 하며, 온 국민이 두 달여 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할 일을 제한 받으며 생업까지 위협받는 일을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가.

‘100-1=0’ 지난 연초 중국의 국가주석이 나라 안 주요 간부들에게 배부하는 ‘홍두문건’이라는 신년인사를 통해 이것을 학습시켜 화제가 됐다. 100에서 1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내용이 무엇인가. 잘못 처리한 안건 하나가 그동안 힘들게 잘 성취해온 99개를 일시에 허물어뜨려 버린다는 것이다. 법을 집행하면서 1만분의 1의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당사자인 국민들에게는 100분의 100의 상처가 된다고도 했다.

법이 힘 있는 자와 위·탈법하는 자의 편에 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섬뜩할 정도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대충주의로 통하던 옆 나라에서 이런 정법운동이 일어나 개혁의 불길이 중국을 사르고 있는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두렵다. 분명한 것은 1%의 실수가 100%의 실수를 낳는 것은 기업의 예도 마찬가지이다. 경쟁사 제품에 비해 1%가 미치지 못 할 경우 그 제품이 설 시장은 없는 것이다.

별 이유도, 친분도 없이 밥 한 끼, 술 한 잔 하자는 사람을 이제는 다시 한 번 더 쳐다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신상필벌(信賞必罰), 반드시 잘하면 상을 주고 잘못하면 벌을 주는 사회가 돼야 한다.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건 그 다음 문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본적인 윤리와 규범은 이미 열 살 이전에 모두 배웠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실습도 했다. 이제 우리는 복습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