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프랑스 파리에 세계 각국의 화가들이 모여들어 활동했는데, 이들을 ‘에꼴 드 파리(파리파)’라고 한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는 여러 가지 유파 주의가 다양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파리파의 화가들은 기존 유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창작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2000년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당진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당진 원주민들로부터 ‘이주민’, 혹은 ‘유입 인구’로 지칭되곤 한다. 이 사람들은 지역의 오래된 관습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만들어 가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렇게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사는 이들을 ‘에꼴 드 당진(당진파)’라고 불러보고 싶다.
‘당진파’는 이미 개인 사업에서, 공공영역에서 왕성한 활동력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지난 4.16 총선에서는 당선자를 결정짓는 다크호스로서의 존재감도 슬쩍 보여 주었다. ‘당진파’는 지역 이슈를 어떻게 보고 있고, 지역민들이 이슈에 접근하는 방식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당진 지역의 이슈 키워드는 ‘송전선로와 석탄화력’, ‘충남도계와 당진 땅’이다. 나라 전체로는 부정부패와 관련된 이슈도 많지만 ‘사드(THAAD)’, ‘가습기 살균제’, ‘세월호’ 등 안전 관련 인권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아산 지역의 ‘갑을오토텍 사태’도 상식을 훌쩍 벗어나고 있다. 연일 폭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슈들은 더욱 뜨거워지는 것 같다.
이슈에 대한 대응은 이해관계에 얽힌 집단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서로 다른 주장이 좁혀지지 않는 경우는 한 발 물러서서 들여다보면 제각각 자기 ‘동굴’에 갇혀서 다른 동굴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못된 참주의 비논리 비합리를 전체주의나 온정주의로 덮고 가는 사례도 있어왔는데, 모두 경계해야 하는 경우다.
그래서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기구는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내부에서 서로 다른 해결책이 상충될 때는 절충하거나, 차선의 방법일지라도 그것에 합의할 수 있는 절차를 갖추어야 한다. 대체로 이런 합의는 ‘동굴(특정 집단 혹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광장(연대체 혹은 열린 공간)’에서 잘 이뤄진다.
광장에는 동등하고 귀중한 수많은 의견이 늘 있어왔다. 이제 ‘공공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광장에서 물어야 한다. 광장에서 토론하고, 광장에서 절충하고, 광장에서 합의해야 한다. 공공의 문제는 광장에서 논해야 제격이다. 더 많은 사람이 토론하고, 더 많은 사람이 합의하면, 더 큰 힘으로 더 빠른 시간에 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러가지 주의(사상)의 영향을 받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창작 활동을 해나간 ‘파리파’처럼, ‘당진파’도 지역 곳곳에서 고유한 생업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당찬 당진을 그려가고 있다. ‘당진파’는 동등하고 귀중한 의견을 갖고 있으며, 16만 당진시민 속에 존재한다. 이들은 숨어있지 않고 광장에 나와 있다. 동굴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나와 이들과 함께 당진의 미래를 그려가는 것은 퍽 의미 있는 시도가 될 것이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통해 취재·보도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