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태 홍 광주광역시 북구청장 인터뷰

1%의 공무원으로 99%의 주민생활영역에 들어가기 1년8개월

누리문화재단쪾생활협동조합운동등 주민자치 공동체에 앞장

청년간부회의쪾사안별 프로젝트팀 구성등 혁신속에 각종 격식파괴

바른지역언론연대는 민선지방자치단체장 후반기에 접어들어 전국에서 시민운동출신으로 개혁적인 지방자치 행정을 펴는등 바람직한 기초자치단체장을 약 10명정도 예정으로 엄선하여 그 실천내용을 매월 1회 공동보도함으로 올바른 지자제 실현에 기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광주에 오게 되면 광주시민들의 에너지를 결집해낼 수 있는 화학방정식을 찾아내고 제련소를 만들어 생산력 있는 제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고등학교 교사에서 기자, 재야운동가를 거쳐 지금은 50만 북구시민의 자치행정을 맡은 행정가로 변신한 김태홍 광주광역시 북구청장(55세). 그는 1년8개월여간의 행정가생활을 통해 ‘화학방정식’을 찾아내고 ‘북구청’이라는 ‘제련소’에서 ‘주민자치 공동체 실현’이라는 경쟁력있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그가 구청장에 출마하게 된 것은 ‘주민자치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필생의 꿈을 그의 고향 광주에서 이룩하고자하는 소망 때문이었다. 김구청장이 내놓은 ‘정직하고 인정이 넘치는 주민자치공동체 실현’이라는 97년도 구정목표에는 이를 반영하는 김청장의 깊은 고뇌가 숨겨져있다.

“구청과 동사무소 등의 공무원을 합해 1천3백50명이 근무하는 북구관내의 가장 큰 기관이지만 주민들의 생활영역에 차지하는 위치는 단 1%도 안될 거예요. 저는 나머지 99%의 주민생활영역에 뛰어들기 위해 북구청장에 나왔습니다.”

주민생활영역의 99%에 들어가기위해 김구청장이 손대기 시작한 것이 ‘누리문화재단’의 설립이다. 2천여명의 후원회원을 모집해 장학, 교육, 복지, 문화 등의 사업을 공동체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간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일에는 지금 9백여명이 후원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올 연말이 되면 기금도 10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누리문화재단의 설립으로 주민자치공동체를 이루어가는 토대를 마련한 김청장은 올부터는 무공해 농산물 판매를 통한 ‘생활협동조합’운동으로 실천활동에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2학번 졸업후 사레지오고등학교 교사를 하다 한국일보에 입사한지 2년6개월만에 당시 그 누구도 엄두내지 못했던 임금인상투쟁을 주도했던 혁신적인 인물. 협동통신의 기자를 거치면서 1980년대 기자협회장으로 활동할 당시 5월 신군부의 언론검열 철폐를 주장하며 전국 언론사의 제작거부를 주도하기도 했던 김태홍 구청장은 이 일로 1년이 넘는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의 언론운동은 여기서 그치지를 않았고 ‘말지’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86년 9월에는 ‘보도지침’을 폭로해 수배생활과 고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후 한겨례신문의 제작이사겸 주식담당이사를 끝으로 자치행정에 발를 딛은 것이다.

이처럼 눈에 띄는 운동가로서의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세간의 기대도 그만큼 컸고 자신의 부담도 컸다고 한다. 1년8개월여간의 행정가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공천장을 주었던 김대중 총재와 재야, 언론계등 3곳은 보이지 않게 그를 압박하는 요소였다고 밝혔다. “자치단체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면이야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나와 함께 욕을 먹을 곳이 이곳들 아니냐”고 김청장은 말한다.

그가 걸어온 경력만큼이나 행정가로서의 변신 또한 과감했다. 김구청장은 먼저 북구청의 담벽을 헐어내고 시민공원을 조성하는 일에 착수했다. 주민과 괴리된 문턱높은 관청의 이미지를 헐어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지난해 5월부터 시작한 공사였지만 숱한 난관에 부딪혔다. 북구청 직원들의 반대가 있었고, 의회의 예산부결등 만만찮은 반발이 뒤따랐던 것이다. 직원들이나 의원들의 상식으로는 관청의 담장을 헐어낸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을 추진하면서 계곡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고독을 느꼈습니다. 이런 간단한 일 하나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일을 헤쳐갈 수 있겠는가 하는 암담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민들로부터 가장 칭찬받은 사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원수와 예쁜꽃들로 단장된 3백여평 남짓한 청사앞 공원은 어느덧 주민들의 쉼터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시민공원에는 전국 관청에서는 처음으로 대형벽화를 그려넣는 이변을 만들어냈다. 북구청사 우측상단에 가로 10여m 세로 1.5m 크기로 그려진 대형벽화는 예향의 고향 광주의 옛모습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작가 홍성담씨에 의해 창작됐다. 이 벽화때문인지 북구청은 어느 관청에서도 느껴질 수 없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언론인 출신답게 구청에서 발행하고 있던 구보를 새롭게 재편했다. 고급용지에 일반적인 행정정보의 주입으로만 일관했던 일반적인 관청의 ‘소식지’에 새로운 변화를 준 것이다. 북구청은 96년 1월부터 ‘북소리’라는 이름으로 매월 2회에 걸쳐 타블로이드 배판 8면으로 14만부를 발행하여 전 가구에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데 이는 전국적인 첫사례로 꼽힌다.

북구민들에게 ‘북소리’는 그들의 가슴을 울리는 친구와도 같다한다. 구청의 잘못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을 수 있는 구보가 새롭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북소리의 3면에는 의회소식을, 4면에는 다른 자치단체의 우수한 시책을 실어 주민들 스스로가 구행정에 대해 타 자치단체와 비교하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와 더불어 북구주민들의 따뜻한 사랑의 소리를 싣는 다양한 편집으로 ‘북구보’는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매월 2차례 열리는 편집회의는 김구청장이 직접 참여해 진행된다하니 ‘북구보’의 발행은 진정한 주민자치공동체의 실현을 희망하는 그에게 빼놓을 수 없었던 사업이었던 것 같다.

자치행정을 펴기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조직화와 공무원들의 의식변화가 앞서 가야한다고 보는 김구청장. 29개동중 3개동에서는 ‘주민자치협의회’를 조직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그 지역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길을 열도록하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도 그의 그런 뜻이 실려있다.

북구청은 하위직 공무원들의 파워가 센 곳으로도 유명하다. 7~9급 하위직 공무원들로 구성된 ‘청년간부회의’라는 독특한 제도를 운영하면서 조직내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장회의에 올려진 안건은 청년간부회의에서도 다루어진다고 한다. 김청장은 양쪽에서 올라온 의견을 참조하여 일을 처리해나가는데 일부 과장들은 청년간부회의에 더 귀를 기울인다고 우려할 정도라고 한다.

김구청장이 시책을 수립하는데 한가지 특징이 있다면 전문가들이 가진 지식을 행정에 빌려오는 것이다. 다방면으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 집단을 적극 활용하기 위해 ‘민간위원회’나 사안별 ‘프로젝트팀’을 구성하여 업무의 효율을 높이고 있다. 연구과정에서 항암효과가 입증된 무등산수박의 연구ㆍ생산ㆍ유통ㆍ출하ㆍ홍보ㆍ수출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기획을 짜는 ‘무등산수박연구팀’ ‘도서관건립팀’ ‘재활용센터팀’ ‘도시녹화연구팀’ 등이 그것이다. 이들 기획팀에는 대학교수나 그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로 굳어진 행정가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한다.

이웃 자치단체와의 협의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96년초 내무부가 주관한 전국단체장 교육에 참여해 만난 9명의 단체장들과 ‘머슴골’(주민들의 머슴이라는 생각으로 행정에 임한다는 각오의 표현, 현재까지 회원은 14명)이라는 모임을 함께 해오면서 서로간의 의견교환을 이루기도 했다. 올해는 자치단체의 정보와 경험을 상호교환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이해와 이익을 실현한 창구단일화 등을 위해 전국 기초단체협의회 구상을 추진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구청장이 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그에게 생활상의 큰 변화는 발견할 수가 없다. 신분상승과 출세의 상징으로 고급승용차를 찾는 사람과는 달리 “평생 자가용을 소유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전국 최초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례를 남겼다. 동운동 관사에서 청사까지는 족히 4km. 그는 구청장에 취임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전거를 이용하거나 도보로 출퇴근을 해오고 있다.

그의 소박하고도 청렴한 생활은 기자실이나 경찰서에 나가는 촌지를 없애고, 새마을 지원금도 끊는 용단을 내리게했다. 격식도 파괴해갔다. 구청장에 대한 수위들의 인사, 큰 각도로 꺾는 인사, 구청장에게 차 문을 열어주는 행위 등을 없애갔다. 가끔 과장들을 태우고 본인이 직접 업무용차를 운전하는데 전혀 꺼리낌을 갖지 않는 그는 선거전 보다도 오히려 구청장이 된 이후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과감하고 개혁적인 행정을 집행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의회와의 갈등이라고 말한다. 구청사의 담장을 허무는 일에서부터 부딪혔던 의회와의 갈등은 김구청장이 시작하려는 사업의 곳곳에 제동을 걸어오곤했다. 기자가 찾은 구청장실 한켠에는 ‘의회와 협의하자’라는 문구가 표어처럼 크게 써붙어져 있어 의회와의 불협화음을 짐작케했다.

“의회에서 제가 협의도 없이 독불장군격으로 일을 밀어부치는 사람으로 보고 있어요. 의회와 협의하려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써놓은 것이지요.”

운동가 출신 행정가의 이와같은 ‘관행파괴’는 언론에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1월에는 아시아 저명인사를 집중 조명하는 일본 NHK의 특집프로그램인 ‘아시아의 인물’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 동아일보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뉴스플러스가 조사한 전국 기초자치단체장중 랭킹 3위로 뽑히기도 했다. 김구청장의 자전거 출퇴근, 청사뜰 시민공원조성과 벽화제작등 김구청장이 내놓은 사업들이 나올 때면 지방일간지의 한면을 장식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언론사들이 칭하는 랭킹에 관심을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그는 민선자치단체가 벌이는 행정들이 신선감은 주었지만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삶의 질을 변화시키는 일은 해오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이제는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행정으로 과감히 시선을 돌리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서울에 갔는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민선시대가 되면서 ‘경영마인드’니 ‘재정자립확립’이니 해서 돈벌이에만 혈안이 돼 유료주차장 늘어난 것 말고 변한게 뭐가 있느냐고 따져 묻는 한주민의 말이 내 생각을 바꿔놓았지요.”

이렇게 눈을 돌리면서 시작한 사업이 충효동이나 용전동등 차량운행이 불편한 낙후된 지역에 마을버스를 신설해서 운행을 실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자원봉사센터 건립, 어려운 노인에게 무료도시락 배달, 사랑의 결연, 일곡지구 도서관 건립등 주민들의 피부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복지사업들을 구상하고 있다.

지역공동체를 통해 동서간의 갈등을 극복해가는 것도 그의 바램이다. 그래서 올해부터 대구광역시 달서구와 남구, 광주광역시 북구와 남구가 공동자매결연을 맺어 8.15 광복절 행사를 공동개최하는 것을 비롯해, 식목일 상호교환, 공무원 교환근무, 축제등 행사시에 상호참여를 통해 동서간의 갈라진 정서를 통합하는데도 뜻을 두고 있다.

행정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자신을 공천해준 국민회의, 자신이 상징해왔던 언론계와 재야에 대한 부담을 안고 1년8개월을 보낸 온 김구청장. 이제는 행정틀과 구조에 대해 자신감이 생겨간다는 그에게 또 다른 기대를 걸어봐도 좋을 것 같다.

/해남신문사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