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느덧 74주년을 맞이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음에도 남과 북은 여전히 휴전 중이다. 스무 살 남짓 하던 젊은 청년은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살아서 고향으로 귀환한 참전유공자들의 나이는 어느덧 아흔이 훌쩍 넘었다. 세월이 지나며 당진의 참전유공자들은 1000여명에서 200여명으로 줄었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그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도 점점 잊히고 있다.

6월 보훈의 달, 스스로 잊혀진 영웅이라 일컫는 6‧25 참전유공자회를 찾아 목숨 바쳐 싸웠던 그 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만났다.

오밤중에 끌려갔던 ‘그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역의 젊은이들의 입대와 동원령이 시행됐다. 23살,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최창윤(95) 옹은 오밤중에 나라에 의해 전쟁에 동원됐다. 당시 상황을 기억한 최 옹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영장을 정식으로 받고 군에 간 것이 아니라 저녁에 자다가 끌려갔다”고 회상했다. 그는 동원 된 후 제주도로 보내져 2주간 훈련을 받고는 천안에 있는 부대에서 본격적인 군생활을 했다.

반면 합덕읍 출신의 정동식(92) 옹은 “나는 21살에 지원해서 입대했다”며 “나라가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 속 ‘그날’

당진시 우강면 출신의 조국형(94) 옹은 21살에 입대했다. 제주도에서 96일을 훈련받고 하사관 학교로 입교했다. 졸업 후 1953년 2월 강원도 전방부대로 올라가 본격적인 군 복무를 시작했다. 조 옹은 당시 상황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전방에 가면 땅에 굴을 파고 밑으로만 다녔는데 위로 철망을 치고 깡통을 매달았다”며 “서로 신호를 주고 받을 수 없으니 그 밑을 지나 다닐 때 철모가 깡통에 부딪혀 소리가 나면 서로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하루에 12시간씩 맞교대를 하며 보초를 섰다”며 “낮에는 보초시간 간격을 드문드문 서고 밤에는 촘촘하게 섰다”며 “그당시 빠릿빠릿한 군인들을 추려서 한달에 두 세 번씩 적군이 있는 곳에 기습을 가는데 오고 가면서 아군의 암호를 모르면 바로 총알이 날라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동식 옹은 총알이 빗발치던 당시 상황에 “나도 전방에 오송산에서 전투를 치뤘다”며 “그때는 밤 10시부터 전쟁이 시작돼 새벽 4시에 전투가 끝났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날까지 동료들의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흐르다 못해 웅덩이를 만드는 것을 보면서 전투를 했다”며 “그땐 전쟁이 끝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고 말했다.

보상은커녕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그날’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3년

7월 휴전이 될 때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대한민국 꽃다운 나이의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됐다. 남한과 북한의 전쟁에 휴전이 선언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슬픔을 위로하거나 보상을 받기는 커녕 어려운 살림에 바로 일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제대 후 나라는 혹시모를 전쟁에 대비하는 예비군을 창설하고, 대한민국의 경제 부흥을 일으키겠다며 각 지역마다 새마을 사업이 시작됐다.

그래도 참전용사들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당시 어렵고 힘든 것도 몰랐다고. 최창윤 옹은 “전쟁에 나가 있는 동안 외아들인 나를 위해 어머니가 추운 밤낮 가리지 않고 물을 떠 놓고 매일 기도했다”며 “어머니는 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 아깝다고 할 정도”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 옹은 그 후 28세에 8세 아래 어린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2남 4녀를 둘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고. 하지만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많은 식구들과 먹고살기란 쉽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했던 일이라곤 물고기 잡는 일이라 어부로 40년을 살았다. 그렇게 고생하며 살다 아내는 40세의 이른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최 옹만 남아 자녀들을 키웠다. 최 옹은 “지금이 행복하다”며 “그땐 너무 어려워 행복한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우리는 잊혀진 ‘영웅’

대한민국 6‧25 참전유공자회에서는 후손들에게 그날의 역사를 잊지 않길 바라는 6‧25학습지를 발간해 배포하고 있다. 면천면 출신의 표순석(96) 옹은 “우리는 잊혀진 영웅”이라며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을 했지만 정부도 국민들도 우리를 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가슴아픈 역사는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국형 옹은 “그래도 김대중 대통령 때부터 우리를 참전유공자라고 하면서 수당을 조금씩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며 “그전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어차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것도 없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만날 수 있다면…

당진시 6‧25 참전유공자회의 참전용사의 수는 코로나19를 기점으로 현저히 줄었다. 1000명 남짓했던 당진의 유공자들은 이제 200여명이 채 되지 않는다. 세월은 야속하게도 기다려 주지 않고 어느덧 모두 아흔이 넘었다. 그만큼 기억들도 흐릿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총성이 울리던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특히 함께 생사를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의 앳된 얼굴과 이름은 잊혀지지 않는다.

최창윤 옹은 “죽기 전에 함께 했던 동료들 얼굴을 보고 싶다”며 “김진우, 이현태, 양재진 강원도 삼척에서 온 내 동료들”라며 이름을 나직히 읊었다. 이어 “만나게 되면 형제보다 더 반가울 것”이라며 “생전에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백발이 성성한 아흔의 참전용사들은 아직도 정정하다. 여전히 보훈회관 내 유공자회 사무실에 모여 그날 전쟁의 잔상으로 남은 아픔과 과거의 어렵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뉜 채 휴전 중이며 세계에서 유일한 마지막 분단국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