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제 전경 모습 (출처 : 당진시청,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
합덕제 전경 모습 (출처 : 당진시청,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

조선시대 대표 3대 방죽으로 알려진 ‘합덕제’. 지금은 걷기 좋은 곳, 혹은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 나는 하나의 공원이지만 과거 이곳은 주민의 생명줄이었다. 그러다 보니 종종 ‘물꼬 싸움’이 일기도 했고, 합덕제의 용수를 쓰지 못하는 비몽리 지역은 설움을 느끼기도 했다. 저수지의 물이 빠질 때는 ‘물 반 고기 반’으로 모두가 배불렀고, 그 주위에는 주막이 성행키도 했다.

그동안 합덕제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사료와 연구는 여러 차례 진행돼 왔다. 하지만 주민의 생활과 문화에 있어 합덕제가 어떤 의미와 가치에 대한 연구는 미흡했다. 당진시는 여기에 주목해 문헌에 기록돼 있지 않은 지역민의 생활문화상을 ‘합덕제 권역 근현대 구술사 용역’을 진행해 왔다. 제작은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협동조합이 맡았다.

그리고 읽기 쉽도록 ‘구술사로 만나는 지역문화사’ 책자를 합덕수리민속박물관 개관 20주년에 맞춰 발간했다.

합덕제 전경 모습 (출처 : 당진시청,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
합덕제 전경 모습 (출처 : 당진시청,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

“합덕제 아니면 합덕 사람들 굶어 죽는다”

이번 구술서는 총 11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중에서는 합덕의 모경 문화와 헙덕제의 변천사, 그리고 합덕제의 수산 자원, 새롭게 발견된 생활문화상 및 합덕제에 얽힌 아픈 역사까지 망라됐다.

구술에 의하면 합덕제는 주민들의 젖줄이었다. 주민 오경섭 씨는 “어릴 적에 합덕성당 신부님도 ‘합덕제 아니면 우리 합덕리 사람들 다 굶어 죽는다. 연호제 때문에 먹고 산다’고 말한 그 말이 맞다”고 말했다.

“여기는 가만히 앉아서 합덕방죽 물로 편안하게 농사 지어 먹었쥬. 합덕방죽이 고맙죠. 상당히. 그때는 최고가 뭐냐, 식량이거든요.(…) 여기 삼호, 하흑, 신석리, 옥금리 등 내 나이 먹은 사람들은 합덕방죽을 잊지 못하지. 젖줄, 생명줄이었어. 생명줄.”(주민 최영돈 씨)

합덕제는 1960년대까지 합덕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저수지였다. 합덕제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던 논의 규모도 약 1만5000마지기(최대 3000평)였다. 합덕제는 조선 3대 방죽에 걸맞게 당진을 넘어 조선 농업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비몽리 주민에게는 ‘그림의 떡’

합덕 사람들은 합덕제의 몽리지역을 가리켜 ‘육개몽리’, ‘육동목리’, ‘육덕목리’ 등으로 불렀다. 육개몽리는 여섯 개 마을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도리와 옥금리, 신석리, 삼호리, 신리, 합덕리에 해당한다.

이 몽리 지역에서도 물꼬싸움이 빈번했다. 비몽리 지역에 비해서 농업용수에 대한 걱정은 적었으나, 몽리 구역이 넓고, 저수량은 한정돼 있어 계절이나 기후에 따라 농업용수 부족에 시달리는 일도 있었다. 또 육개몽리 안에서도 농토의 위치에 따라서 물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과 아닌 곳이 나뉘었다. 그래서 모내기철이면 주민들 사이에서 물꼬 싸움이 흔히 벌어졌다고 한다. 물꼬는 논에 물이 넘어 들어오거나 나가게끔 만든 좁은 통로인데, 먼저 자신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서로의 물꼬를 막거나 여는 싸움이 물꼬 싸움이다.

“물싸움이 대단했죠. 만약에 위에 농사짓는 분이 밤새 낮부터 하루 종일 물을 채워 놓고서 밤에 집에 들어갔는데, 아래 땅에 있는 사람이 그 뚝을 뚫어 놓는 거야. 뭐 그래 가지고 싸우고 장난 아니었지. 그 물싸움이 대단한거야.”(주민 문종규)

몽리 지역에서 물꼬 싸움이 일어날 때, 비몽리 지역은 물을 보고도 농사짓지 못하는 설움을 삼켜야 했다. 그동안 합덕지역 향토사 연구에서는 합덕제와 몽리 지역이 중요하게 다뤄져 왔다. 반면 합덕제와 인접했으나 몽리 지역에 포함되지 못한 비몽리 지역은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는 비몽리 지역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이뤄졌다.

합덕제에서 1952년 6월 15일 성체 거동을 기념하는 모습
합덕제에서 1952년 6월 15일 성체 거동을 기념하는 모습

비몽리 지역은 몽리 지역이 아닌 탓에 합덕제 물을 이용하지 못했다. 집 앞에 수 만평의 저수지가 있었으나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중 대표적인 마을이 성동리였는데, 합덕제 제방의 상당 면적이 성동리 경계에 접해 있었지만 합덕제 물은 이용하기 어려웠다. 그 외에도 운산리의 하운, 석우리, 창리, 점원리도 마찬가지였다.

“고생 많이 했죠. 하늘만 쳐다봤죠. 방죽의 물이 얼마 안 되거든요. 옥금리 정도는 조금 혜택을 본 것 같더라고요. 어릴 때 살던 하궁원은 방죽 물이 오질 않았다고 관개 시설도 안 되어 있었고 똘도 없었어요.”(주민 이필운)

역사 속의 합덕제 모경 문화

모경(冒耕)이란, 땀 임자의 허락 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 저수지 인근에서는 이 모경이 흔하게 일어났다. 저수지의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토지에 개인이 불법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저수지의 모경이다. 일시적으로 생기는 저수지의 땅에는 주민이 따로 없어 먼저 차지하는 게 임자였다. 저수지 터에서 경작한다는 것이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조선시대의 합덕제를 비롯해 벽골제와 남대지 같이 평야지대에 제방을 쌓아 물을 저수하는 저수지에는 권세가에 의한 모경이 빈번했다.

이 합덕제 제내답의 모경은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이후부터 꾸준히 문제가 됐다. 1894년 합덕제의 물로 농사를 짓는 ‘육개몽리’ 주민들이 주도한 합덕농민항쟁의 빌미가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권세가에 의한 점령은 잦아들었지만, 합덕제 제내답의 모경 문화는 계속됐다. 특히 지대가 높은 합덕제 상류 지역에서 이뤄져 왔다. 그러나 제내답을 마련해도 농사는 쉽지 않았다. 저수지인 땅에 농사를 짓는 탓에 물 조절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합덕제에 물을 가두려는 몽리 지역 사람들과 제내답의 농사를 우선시하는 제내답 경작 농민간의 갈등도 잦았다.

“방죽 물 빠지먼은 (제내답) 거기다 모 심고. (헙닥제에 물은) 겨울에만 가두고 봄부터 빼잖어. (저수지내 불법 경작인 제내답이 하류 쪽으로) 자꾸자꾸 내려가니까 농사짓는 물이 줄어드는 겨.” (주민 표모영)

합덕제의 모습이 담긴 최초의 사진. 1905년 이전의 합덕제 풍경. (출처 :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 제공 :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전다한)
합덕제의 모습이 담긴 최초의 사진. 1905년 이전의 합덕제 풍경. (출처 :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 제공 :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전다한)

예당 저수지의 신설, 합덕제의 폐쇄

1964년, 합덕제에서 17km 정도 떨어진 예산군에 예당저수지가 설치되면서 합덕제의 관개구역이 예당지의 관개구역으로 편입됐다. 저수지의 기능을 잃게 된 합덕제는 곧바로 농지로 전환됐다. 이 과정에서 합덕제 저수지터 소유권을 놓고 주민간 분쟁 소송이 일어나기도 했다.

오랜 세월 지역의 농경문화와 관련된 중요 시설물이었던 저수지가 그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 소유가 되는 과정에서 지역민들은 모종의 상실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오랜 세월 합덕제를 중심으로 수리공동체를 이루며 대를 이어 살아왔다. 주민들은 구술 인터뷰에서 거듭 ‘억울하다’, ‘빼앗겼다’는 말을 했다.

먹거리 풍부했던 합덕제

합덕제는 아낌없이 내어주는 보물창고엿다. 합덕 사람들은 저수지에 물이 가득했던 합덕제에 대한 추억 중 하나로 ‘고기 잡던 풍경’을 떠올렸다고 한다.

수로나 수문 주변에는 게나 새우를 비롯해 크고 작은 민물고기가 풍부했다. 몽리나 비몽리 따지지 않고 주민 누구든 잡고 채취할 수 있었다. 저수지에 물을 모두 빼는 개통 날이 되면 합덕 사람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도 고기를 잡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합덕제에 갇혔던 고기들이 물과 빠져나가면서 ‘물 반 고기 반’을 이뤘다. 이때 합덕제에 잡힌 어종은 장어부터 가물치, 미꾸리, 잉어, 붕어, 메기를 비롯한 우렁, 새우, 자라 등 다양했다.

또 구술 채록 중에서는 제방 안에서 사금을 채취한 증언도 있었다. 또 합덕제 주변에서는 음식과 술을 팔고 숙박도 가능한 여러 개의 주막도 있던 것이 확인됐다. 다수의 주민이 합덕제 주변에 있던 주막에 대해 구술키도 했다. 주막에서는 합덕제에서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 판매했으며, 타 지역 사람들도 이용했다.

구술로 만나는 지역문화사 발간을 위해 구술 채록을 하고 있는 연구조사원과 주민 모습
구술로 만나는 지역문화사 발간을 위해 구술 채록을 하고 있는 연구조사원과 주민 모습

마르지 않았던 ‘용샘’

합덕제가 폐쇄되기 전까지 가뭄이 들 때면 연제수리계의 주관으로 기원제가 성행키도 했다. 기우제가 열린 합덕제의 용샘은 30여 평 남짓한 작은 방죽이었다. 대호마을과 접해 있는 성동리 조쟁이로 가는 합덕제 안에 있었는데, 날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적이 없었다고 알려진다.

용샘과 관련된 또 하나의 방죽이 용충이다. 면적이 1000평에 달하는 큰 방죽이었는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솟아나는 수량이 풍부해 ‘흉년 밥그릇’이라 불렀다고 한다. 명주꾸리 한 타래가 다 들어갈 정도로 속이 깊었는데, 물이 귀하던 시절에 이 용충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장소라고 귀하게 여겨졌다. 용충에 용이 살고 있거나, 용충의 물길이 서해와 이어져 있다고도 전해졌다. 정동식 씨는 “어른들이 용충은 물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변한다고, 물의 색이 항상 변한다는 전설을 말했다”며 “고기도 많고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던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용충은 1980년대 후반 쓰레기를 매립하고 논으로 개간해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됐다.

합덕제의 아픔

이번 구술서의 마지막은 합덕제의 아픔으로 끝이 난다. 합덕농민항쟁의 발단이 된 전라도 고나찰사 이정규의 탐학과 한국전쟁 전후로 지역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상 갈등에 의한 살인 사건 등이 합덕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비극의 역사다. 구술 인터뷰에 참여한 주민들이 동시대 겪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건은 연제수리계 사무실에서 좌우익 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보복적 살인 사건과 19740년대 가장 심했다고 전해지는 ‘마름’의 횡포였다.

합덕제 몽리 지역은 논의 면적이 넓어 수확량이 많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실부터 세도가에 이르기까지 국법을 어기고 침탈을 일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합덕 지역 농민들의 수탈은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까지 지속됐다. 구술인터뷰에 참여한 주민들은 생애 중 가장 수탈이 심한 시기로 1940년대를 가리켰다.

그리고 옛 문헌에 따르면, 합덕농민항쟁이 전라도 좌수사를 지낸 이정규의 탐학에 대항해 합덕제 주변 육개몽리 농민들로부터 시작됐다. 합덕제 수문 중 하나인 본동수문 부근은 수심이 깊고 고기가 많이 잡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서 잡은 고기는 이정규에게 가져다 바쳐야 했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곳을 ‘이병사구멍(녕)’이라 불렀다고 한다.

연구사들은 “주민들의 구술사를 통해 합덕제가 주변 몽리지역에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관개시설이자 지역 주민들의 생활, 문화,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지역 문화유산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쓸모와 형태에는 다소 변화가 있었으나, 합덕제는 여전히 합덕지역의 주요 산업인 농업과 더불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합습의 장이자,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외지의 관광객이 모이는 문화의 장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