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를 영원히 사라지게 한 백강전투가 당진에서 떠오르다
중학교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나는 국사 교과서를 보면 늘 아쉬운 것이 있었다. 국사책에 당진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과부도의 시대별, 나라별, 주제별 지도를 꼼꼼히 다 찾아봐도 당진에 크고 진한 동그라미가 되어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역사 속 당진의 ‘한 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한 방은 매우 큰 사건인데 멸망한 나라 백제의 패전이라 그런지 한국사에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아서 나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몇 년 전 『역사의 역습』(김용운,2018,맥스)을 읽으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역사다.
그런데 얼마 전 간송미술관 최완수 소장의 글 최완수, 「내포지역의 불교」, 『열린충남』, 2002,1.
속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가 내포지방을 중심으로 부흥군을 일으켰고 부흥군의 정신적 지주였던 도참 대사는 수덕사 승려로 추정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설마 하는 마음에 근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검색하자마자 뜻밖에 ‘당진’을 만났다. 당진의 여러 지역 신문이 백강 전투가 당진시 석문면 앞바다에서 벌어졌고 그 곳에서 원혼을 달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올려 놓았던 것이다. 당진시대, 2022,9,30.

백강 전투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들은 그 근거로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표한 ‘나당전쟁사’를 들고 있었다. 당장 그 책을 찾아 읽고 싶었으나 예정된 서산당진 답사를 먼저 하고 책은 현장을 다녀와서 찾아 보기로 했다. 운산과 당진의 불교 유적을 답사한 뒤 호서 고등학교 은사이신 김남석 선생님의 안내로 백강 전투 희생자 무덤과 전투지로 추정되는 석문 바닷가를 두루 찾아다녔다.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 사납게 부는 바람은 몸을 잔뜩 움츠리게 했다. 전날 보원사지와 서산 마애불에서 느꼈던 온화한 날씨는 온데간데 없었다. 순천에서 함께 간 친구와 함께 김남석 선생님의 차를 타고 영랑사에서 출발해 석문 방향으로 가다가 큰 길에서 벗어나 논밭 쪽으로 들어가는데 아주 익숙한 느낌이었다. 장항리,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가 사시던 마을 앞쪽이다. 새로 난 도로만 아니면 외삼촌 댁이 빤히 보이는 곳이었다.
막무덤, 백제부흥군의 무덤일까?


‘무덤골(막무덤)’이라고 써 있는 작은 표지판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러나 근처를 아무리 둘러봐도 큰 무덤이나 고분처럼 생긴 봉우리는 없었다. 우리는 언덕을 올라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 앞장 서서 창고 같은 곳으로 가셨던 김남석 선생님이 얼마 뒤에 어르신 한 분을 모시고 나왔다.
“여기 비닐 하우스 지을 때 묘가 능처럼 이렇게 큰 게 있었쥬. 낙엽송이 그 위에 저것만한 것이 있어서 그거를 비어내고 하우스를 지은 거쥬.”
김남석 선생님의 질문에 어르신이 길가에 서 있는 큰 참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키 큰 상수리 나무가 서 있는 큰 무덤을 밀고 비닐하우스를 지었다는 것이다.
“어르신이 봉분을 보시긴 보신 거죠?”
“그렇쥬.”
“밀어냈어도 나온 것도 없고...”
당연히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 옛날 고대 국가 왕족들의 고분처럼 돌로 제대로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했다면 돌방이나 무덤돌들이 나올텐데 큰 구덩이를 파고 그냥 막 묻었다면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런데 그 어른신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셨다.
“예전부터 일본 사람들이 단체로 찾아오고 그랬슈.”
나는 급히 물었다.
“예전이라면 대략 언제부터인가요?”
“수십년 전이쥬.”
일본 사람들은 이 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그들은 이곳을 백제 부흥군의 무덤이라고 확신하는 것일까? 예전에 여기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고, 먼바다에서 떠다니던 시신들이 여기까지 밀려와서 막 한데 묻었다는 것인데, ‘무덤골(막무덤)’ 표지판은 누구의 무덤인지 아직 주체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누구의 무덤이든 참으로 비참한 무덤인 것만은 확실하다.


다시 차를 타고 백강 전투지로 추정된다는 석문 앞바다 곳곳을 돌아보았다. 용무치 해안, 장고항, 왜목 마을, 석문국가산업단지. 드넓은 산업단지는 본래 갯벌이었으나 인간의 손으로 그렇게 바꿔 버린 것이다. 바닷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걷기도 힘들었으나 멀리 화력발전소의 굵은 연기는 흔들림 없이 빠르게 하늘로 솟구쳤고,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게 늘어선 수많은 송전탑의 굵은 전선은 거센 바람에 꿈적도 하지 않았다. 과연 이곳이 1400년 전 백제를 멸망시킨 백강전투의 현장이었을까?
석문이 백강전투지라는 근거는 어디에?
나는 석문 앞바다가 백강 전투지라는 정확한 근거를 찾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순천대학교 도서관을 여러 차례 들락거리며 일반 서가와 보존서고를 뒤져 『민족전란사 11 <나당전쟁사>』(서인한,1999,국방군사연구소)를 찾았다. 국방군사연구소가 쓴 것이니 뭔가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썼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본문에는 당진이 백강 전투지라고 추정한 지도만 실려 있을 뿐 아무 이야기가 없고 책 맨 뒤 ‘주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백강구전쟁과 백제 왜 관계』(변인석, 한울역사학강좌,1994) 참조 : 백강구의 위치에 대하여 금강 하류나 동진강 하류로 추정하는 일본인 학자의 주장도 있으나,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변인석과 정순태(「반외세 통일의 군주 문무왕-문무왕과 백제왕 부여풍 행적을 따라」(월간중앙 WIN 11월호, 1996)가 당진군 석문면 백석 해안이라고 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이에 따랐다.’
즉 국방부에서 직접 연구한 것이 아니라 변인석과 정순태의 연구가 설득력이 있어 이에 따랐다는 것이다. 다시 도서관 검색창에서 변인석과 정순태의 연구를 찾았다. 정순태의 연구는 나오지 않고 변인석의 연구를 찾을 수 있었다. 1994년 한울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변인석의 글은 단행본으로도 나와 있었는데 오래 되고 낡은 책이었다. 우선 저자 약력을 찾아 보니 고려대학교 사학과 출신으로 중국과 일본에서 연구원 활동을 오래 했고 1994년 현재 동양사학회 회장이며 아주대학교 교수로 되어 있었다.
변인석은 ‘이 전쟁에 대한 국내에서의 연구는 일본에 비해 아직도 미흡한 상태이다. 어느 면에서 본다면 이 전쟁이 당시의 국제정세 및 한일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과제임에도 일본 사서에 나타난 기록의 불리함 때문에 회피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일본서기』에서 일본은 백강전투를 대당(大唐)과 대일본(大日本)군의 대결로 보면서 백제의 요청에 불려 온 구원병이 아니라 일본을 중국과 대립시키는 강한 세력으로 올려 놓으며 일당(日唐 )전쟁, 대당군(大唐軍)과 황군(皇軍)전으로까지 부르기를 서슴치 않으며, 당 수군과 일본 수군과의 대결로 부각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말이 걸렸다. 중국 쪽 역사책인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분명히 백강구 전쟁의 주도 세력은 일본군이 아니라 백제의 왕자 부여 풍을 따르는 백제계 도래인으로 지방 호족의 사병들이었으며 일본의 중앙 정규군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이 외면하는 동안 중요한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은 고구려사를 자기 나라 역사로 만들려 하고 일본은 백제사를 자기 역사로 엮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에서는 이 전쟁의 군사적인 행동이 정한론(征韓論)에 치우쳐 미화되었고 이미 한반도 남부에 구축해 놓았던 식민 경영을 다시 건설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니 일본 사람들이 당진의 막무덤을 찾아 온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그들은 고대사에서 자기들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소제국론’을 확인하기 위해 전적지를 찾는 데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변인석은 백강전투지를 당진으로 단정 짓지 않았다. 백강전투의 역사지리적 고찰에서 종래의 견해를 자세히 소개하면서 군산포설, 금강설, 동진강설, 줄포설과 함께 당진 석문 바다가 포함되어 있는 남양만설도 소개하고 있으나 모든 지역이 가능성과 한계를 다 가지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런 변인석의 글을 근거로 백강전투지를 당진으로 소개해 놓은 것은 국방군사연구소의 명백한 잘못이다. 국방군사연구소라는 기관 이름에 대한 신뢰감 때문인지 당진 사람들과 언론에서는 원전을 찾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전파했던 것이다.
한편 변인석은 여러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제시하는 백강전투지와 백제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 하나하나 가능성과 한계를 짚었는데 당진 석문설은 예산의 향토사학자 박성흥의 연구에서 유래했다. 박성흥은 일본 도쿄 대학 2학년에 재학 중 전쟁을 만나 중퇴하고 이후 공무원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 왜곡을 심하게 하는 것을 보고 울분을 느껴 역사 탐구에 몰입, 홍성이 백제부흥군의 근거지 주류성이었고 당진 석문이 백강전투지였다고 주장해 왔다. 향토사학자 박성흥씨, 한겨레신문, 1993,8,29.
백강 전투지가 삽교천이라는 새로운 주장

이렇게 백강전투와 당진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AI 덕분에 뜻밖의 대단한 연구서를 만났다. 2023년 12월에 나온 『백제 아포칼립스』(서동인, 주류성 출판산)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 서동인은 백강을 정확히 ‘당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박성흥과 달리 ‘석문’이 아니고 ‘삽교천’을 내세우고 있다. 저자는 매우 오랫동안 백강전투 추정지라고 여겨지는 모든 현장을 수십 번 답사하고 한중일 고대 역사서와 지명의 변화, 신라의 향찰까지 연구해서 얻은 결론이라고 했다.
그는 1차 백강 해전은 663년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이 네 번에 걸쳐 싸운 것이고, 2차 백강 해전은 삼국통일 후 신라가 당을 물리친 전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백강은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의 현장인데 삽교천 하구 우강 강문리 일대가 그 현장이라고 명확히 주장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6월조’에 기록된 ‘백강을 기벌포라고도 한다.’로 백강의 다른 이름이 기벌포였는데 ‘기벌포’라는 지명의 변화를 분석해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와 남원포구로부터 구양도 일대까지를 기벌포 범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대동지지(大東地志)』의 ‘백제 때 석두 동쪽, 즉 가리포에 창고를 설치하고 벼를 쌓아두어 수군의 밑천으로 삼았는데 후에 당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와 창고를 어지럽혀 없애버렸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하고 다시 그 자리에 창고를 두었다.’는 기록이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당진에 상륙하지 않았으면 있을 수 없는 내용이라고 말하며 가리포는 면천 사평현 갯가마을로 백강 인근이라고 주장한다.
그밖에 저자가 당진을 백강으로 단정짓는 근거는 더 있지만 정리하기가 매우 복잡하다. 어쨌거나 이 책 덕분에 백강전투지 후보 중에 당진이 가장 유력해 진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변인석이 백강의 위치 비정 문제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게 ‘백강은 웅진강과 주류성 사이에 있고 그 거리가 멀지 않는 것으로 느껴진다.’ 변인석, 『백강구전재과 백제 왜·관계 관계』,1994, 도서출판 한울
했는데 석문보다 삽교천 안쪽이 주류성(홍성)과 훨씬 가깝다. 그런데 석문과 삽교천이 같은 아산만으로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나당 연합군과 왜선 수백 척 또는 수천 척이 접전을 했다면 모두가 전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석문부터 삽교천까지를 모두 백강이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멸망한 나라의 백성들은 몹시 고달픈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1만 3천 명의 포로가 당나라로 잡혀갔고 일본으로 피난길에 오른 이들도 대략 20만은 될 것이라고 한다. 백제 피난민의 고달픈 여정을 기록한 『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구나! 언덕 위의 무덤 자리에 어찌 다시 갈 수 있을까?’하며 조상의 묘에 다시 갈 수 없게 된 것을 한탄하고 있다.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은 백제인의 한을 이용해 정한론을 만들고 한반도 침략을 충동질해 왔다.
고대 국가는 모두 흥망성쇄의 길을 걸었다. 백제만 망한 것이 아니다. 고구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도 망했고 고려도 망했다. 전세계 모든 나라가 그런 길을 걸었다. 그런데 1400년이나 지난 한을 오늘날까지 이어 붙이며 침략을 합리화하는 것은 전쟁광들이 하는 짓이다. 진정한 백제인의 후손들이라면 백제의 미소를 닮아 조상의 나라 한국과 평화롭게 지내길 원할 것이다.
당진에서 백강전투 전국 규모 학술대회 열어야


일본 ‘가라쓰’는 한자로 당진이다. 임진왜란 때 첫 출병을 했던 곳이고 백제부흥군이 출병한 곳이라고도 한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한국의 당진과 일본의 당진이 자매결연을 맺어 한일관계의 평화로운 상생을 위한 우정의 다리가 되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백강전투의 현장이 분명히 당진인지 제대로 밝히는 학술대회를 열고 학계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해 온 재야 사학자들의 견해를 충분히 듣고 전문 연구자들의 객관적인 고증과 토론, AI를 이용해 지금까지 나온 모든 자료들을 서해안의 모든 예비 백강구에 적용시켜 검증한다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그 답이 당진이 된다면 어릴 적 내 소망도 이루어질텐데...역사 교과서에 당진이 나오고 사회과부도에 당진이 진한 동그라미로 표시되는 소망 말이다.

>>김양오 작가는
(당진 출신 역사동화 작가)
- 당진 탑동초·호서중·호서고 졸업
- 인하대학교 사학과 졸업
- 대표작 <도자기에 핀 눈물꽃>이 세종도서, 청소년 북토큰 도서, 전북교육청 추천도서 등으로 선정. 이 외 <백 년 동안 핀 꽃>,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 <아리아리아라리요>등 출간
- 현재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