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풀잎 음계를 밟으며 아이는

힘차게 달린다

차고 단단한 풀 씨들이

무릎을 타고 날개를 펼칠 때마다

높은음자리로 올라가는

맑은 목소리

곡선의 노을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산자락에

얼굴을 묻고

멀어질 듯 다가올 듯

선연한 색채의 침몰 속에서

고요한 눈시울이 붉다

저녁 해는 어디 갔을까

탐미耽美의 그늘 아래서

세상의 넓이를 꿈꾸는 아이

2.

눈을 떴다

새하얗게 지워지고 남은 여백은

선과 선의 몸부림으로 이어져 있고

때론 충돌하고 있었다

무엇을 그려왔는지

들판에는,

헝클어진 머릿결처럼

쓸쓸한 어둠이 비로소 일어서고

하루 분의 양분을 흡수하는 자의

거친 손으로

부드럽게 일렁이는 풀잎 위에

불꽃이 살아나고 있다

끈끈한 애정의 긴 한숨을 도려내면서

질척한 생의 한줄기 목청으로

빛나는 밤하늘

별들의 차가운 입김이

캔버스에 뛰어 내리고 있다

3.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오는 것은

하얀 백지가 아니라

별빛 보다 가벼운 영혼이었다

생의 부피를 더듬거리며

촛불처럼 타들어 가는

나의 눈이여

4.

풍경 밖에서 그를 만났다

왼쪽 가슴에 무한한 물음을 던지며

내 손을 잡는 그

이제 그만 시를 가슴속에 묻으라고 했던

그의 눈시울이 젖어 있다

이제 알겠다

버릴 수 없는 물감들이 이곳에선

신앙처럼 존재한다는 것을

하늘과 지상의 명암이

사라진 세상은

끝이 없는 길로 이어지고...

5.

폭풍의 중심에서 손을 잡아준

그대는, 나의 누구인가

껍질 같은 공간에서 평면처럼

부르짖었던 색채를

믿음으로 벗겨준

그대는, 나의 누구인가

색칠을 한다

물감이 없는 붓으로

붓이 없는 숨소리로

숨소리가 없는 붓으로

텅 빈 캔버스에 세상을 색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