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몽산(蒙山) 출처:국토지리정보원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몽산(蒙山) 출처:국토지리정보원

편집자 주 - 시민의창은 분야별 역량을 갖춘 당진지역 전문가들이 참여해 각 분야의 영역을 심층 취재, 보도하는 코너입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작 보도합니다.

‘향(鄕)’은 흔히‘시골 향’으로 풀이한다. 『한자어원사전』에 보면, 음식을 담은 그릇이 가운데 있고, 양옆에는 서로 마주 앉아 식사하는 두 사람이 새겨져 있다. 이는 ‘한마을에 살며 함께 음식을 나누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래서 ‘향’이라는 글자에는 지역 공동체의 기초가 되는 마을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간다는 정겨운 의미가 담겨있다.

역사용어로도 ‘향’은 많은 곳에 쓰인다. 향교(鄕校), 향약(鄕約), 향청(鄕廳, 유향소), 향리(鄕吏), 향사(鄕社), 향촌(鄕村),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이 그 용례다. 이 때문에 필자는‘향(鄕)’이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의 부ㆍ목ㆍ군ㆍ현(府牧郡縣), 즉 지방관이 부임하는 행정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씨의 본관을 말하는 관향(貫鄕)도 같은 ‘향’을 쓰는데, 당진지역의 경우에는 당진, 면천, 신평을 들 수 있다. 모두 옛날(백제)부터 지방관에 파견되었던 곳이었다(그러나 인공지능(AI)은 ‘향’의 개념을 지방행정단위로 단정해서 볼 수는 없고, 서울에 대응하는 ‘지방’ 정도로만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교(校)’는 학교 교자다. 이는 ‘木(나무 목)’과 ‘交(사귈 교)’가 합친 것으로, 나무를 서로 맞대어 비교하거나 대조하는 것을 뜻했다. 여기서 ‘교(校)’가 학교를 의미하는 것은 학생들의 학습 정도를 비교하고, 점검하며, 바로잡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교는 학생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또 학생이 이를 배우는 기관을 뜻하게 되었다. 결국, 향교(鄕校)는 ‘지방의 관립학교’혹은 ‘국가가 지방의 부ㆍ목ㆍ군ㆍ현에 세운 교육기관’을 말한다(학생 수는 행정구역에 따라 달랐다. 부와 목은 90명, 군은 50명, 현은 30명이다).

홍살문(면천향교 입구)
홍살문(면천향교 입구)

면천향교는 당진시 면천면 동문2길 36-7(성상리 513)에 있다. 향교는 박지원의 애민사상이 깃들어 있는 골정지의 뒤편, 야트막한 산자락에 자리하였다. 자세히 보면, 몽산(蒙山, 夢山-‘꿈산’은 조선시대 지리지 어디에도 없는 단어로 오류임)을 뒤로 하고, 남으로는 골정지를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다. 주변에도 완만한 능선이 있어서 은연중 향교를 감싸는 듯하다. ‘풍수지리’에 문외한인 우리 같은 사람이 보더라도 면천향교의 위치는 교육을 통해 학생을 길러내고, 제례를 통해 성현을 배향하는 매우 안정적인 장소(명당)로 여겨졌다. 건축과 공간구성은 유교의 예제(禮制)를 기본으로, 입지 선정은 풍수지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향교는 관아가 있는 면천 읍성의 동쪽에 있다. 이것은 공자를 모신 문묘를 동쪽에 두는 ‘문묘동치(文廟東置)’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동(東)은 해가 뜨는 곳이며, 만물이 움트는 길한 방향이었다. 한양도성의 ‘좌묘우사(左廟右社)’도 비슷한 공간배치다. 임금이 거처한 궁을 중심으로 좌측(동쪽)에 종묘, 우측(서쪽)에 사직단을 배치한 형태다. 조상신을 추모하는 종묘는 효(孝)의 상징으로 동쪽에 두고 수확을 의미하는 토지신을 서쪽에 두었다.

면천향교의 건립 시기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는데, 『면천향교지』에는 1366년(공민왕 15)임을 강조한다. 아울러 대성전(大成殿)이 맞배지붕 형태이고, 신문(神門)이 독문(獨門)이며, 좌우로 창문을 낸 것이 고려시대 건축양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성전을 비롯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을 거치면서 일부 무너졌지만 전란 후에 곧바로 보수함으로써, 초창기 건물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한다. 현재를 기준으로 볼 때, 면천향교는 660년의 연륜을 간직한 건축물이라 하겠다. 더욱이 수많은 기간을 거치면서 한 번도 이전하지 않고, 옛터를 지키고 있어서 그 유구함이 더하다.

주목할 사실은 면천향교가 읍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먼저 건립되었다는 사실이다. 면천읍성이 1473년(세종 21)에 축조되었음을 고려하면, 면천향교는 적어도 읍성보다 107년이나 앞서서 세워졌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격동기의 집권자들이 성리학의 지방보급에 대한 중요성을 국방력 강화를 위한 읍성 축조보다 시급하게 인식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마비(홍살문옆)
하마비(홍살문옆)

홍살문과 하마비가 전하는 예(禮)의 정신

향교에 이르면 우선 커다란 홍살문(紅箭門)이 방문객을 맞는다. 이 문은 홍문(紅門) 혹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부른다. 화살 전(箭)을 우리말인‘살’로 풀이하여 홍살문이라 한다. 붉은 화살은 잡귀와 액운을 막는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중앙의 태극 문양과 하늘을 향한 삼지창은 성현을 모신 공간의 권위를 드러낸다. 이곳부터 성역(聖域)의 시작이다.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하마비의 높이는 95㎝, 받침석까지 더한 총 높이는 122㎝이다. 두께는 21㎝, 폭은 46㎝이다. 지붕돌이 없는 선돌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 매우 흡사하다. 하마비의 앞면에는 ‘下馬’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뒷면과 옆면에는 마모가 심하여 글씨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하마비는 ‘大小人員皆下馬(대소인원개하마)’라는 글을 새겼었다. 왕과 그 친족이 아니면,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도 이 비석이 보이면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향교가 성현을 모신 장소이면서 학문을 연마하는 신성한 장소이니 예(禮)를 갖추라는 의미다.

‘하마평(下馬評)’이란 말이 있다. 하마비 근처에서 상전이 내리면 가마꾼이나 구종, 별배 들은 적당한 곳에 말을 묶어 두거나 가마를 내려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주제는 상전의 인품이나 식견, 승진 가능성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시대 면천향교에서 행사가 있었을 때 모였을 가마꾼들을 상상해본다. 향교의 책임자인 도유사(都有司, 현 전교)의 가마꾼들, 순성역을 관리하던 찰방(察訪, 종6품)을 말에 태운 구종(驅從, 말고삐를 잡고 수행하는 사람)들, 면천군수(종4품)를 가마에 태운 가마꾼과 별배(別陪, 시위꾼)들, 면천 향청(鄕廳, 유향소)의 좌수(座首)어른 가마꾼들, 이들이 수군거렸을 차기 군수에 대한 하마평이 하마비 부근에서 있었지 않았을까.

학고재
학고재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

면천향교의 대문은 ‘외삼문(外三門)’이다. 이곳부터 실질적인 향교의 영역이다. 가운데 문은 신문(神門)이고 양쪽 문은 인문(人門)이다. 신문은 춘추 제향이나 삭망(朔望,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열어서 헌관(獻官, 제관)만 출입하고, 일반인은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오게 된다. 이를 ‘좌입우출(左入右出)’이라고 하는데, 예법(禮法)에 의한 동선이다. 유학의 세상에서는 항상 좌측(동쪽)이 우측(서쪽)의 상위에 있다. 외삼문도 맞배지붕 양식을 띠고 있다.

외삼문 안쪽에는 ‘명륜당(明倫堂)’이 있고 양쪽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다. ‘명륜’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인데,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명륜당 건물은 팔작지붕으로 매우 세련된 모습을 띠고 있으며, 편액(현판) 글씨는 주자(朱熹, 1130~1200)의 글씨라고 전한다. 한편, 재(齋)는 유생의 기숙사로 동재에는 상급이나 양반의 자제가 머물고, 서재에는 후배들이나 양민의 자제가 머물렀다. 동재와 서재의 기둥에는 유학의 가르침을 담은 주련(柱聯)이 있어 옛 선비의 학문 정신을 전하고 있다.

면천향교 명륜당
면천향교 명륜당

공자를 모신 대성전과 동방 18현

명륜당과 동ㆍ서재를 지나면, 계단으로 올라 내삼문으로 거쳐 대성전에 들어간다. 내삼문은 외삼문과 같은 형태로 ‘좌입우출’의 방식으로 통행하는데, 이곳부터는 제향의 영역이다. 면천향교 배치양식의 핵심은 ‘전학후묘(前學後廟)’다. 즉, 앞은 교육 공간이고 뒤는 제향 공간이다. 다시 말하자면, 명륜당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고 글을 배우며 경전을 연마하는 교육의 장소이며,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또한 대성전 좌우에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건물을 배치하여 유현(儒賢)의 위패를 배치하였다.

대성전의 대성(大成)은 공자의 시호(諡號)인데, 공자를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다. 면천향교에서는 이곳에 오성위(五聖位)를 배향하는데, 그들은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이다. 공자는 대성지성문선왕 공부자(大成至聖文宣王 孔夫子)다. 복성공 안자(復聖公 顔子)는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이다. 종성공 증자(宗聖公 曾子)는 공자의 제자인 증삼으로 효경(孝經)의 대상이다. 술성공 자사(述聖公 子思)는 공자의 손자로 『중용』의 저자로 유명하다. 아성공 맹자(亞聖公 孟子)는 『맹자』의 주인공으로 공자와 더불어 원시 유학의 이론을 정립한 인물이다. 대성전의 편액(현판)은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지만, 글씨가 매우 힘차면서도 단정하다.

대성전의 기둥이 다른 건물과 달리‘원통형 기둥’인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향교의 공간구성도 정확히 직사각형인데, 모두 ‘천원지방(天圓地方)’사상이 접목된 것이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라는 의미로, 공자를 지극히 존귀한 ‘지존(至尊)’, 즉 ‘하늘(神)’로 간주한 것이다. 이는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나 불상이 모셔진 불전도 건물의 기둥이 모두 둥근데 같은 원리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따른 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음과 양의 조화로 파악한 것이다.

대성전의 내부
대성전의 내부

대성전 좌우에 있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는 대성전에 배향하지 못한 유현(儒賢)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다. ‘무(廡)’는 행랑이라는 뜻으로 큰 건물의 좌우에 길게 지은 부속 건물을 말한다. 동무에는 중국 송나라 학자인 정호(정자)을 앞에 두고, 설총ㆍ안향ㆍ김굉필ㆍ조광조ㆍ이황ㆍ이이ㆍ김장생ㆍ김집ㆍ송준길 등 10명을 배향하였다. 한편, 서무에는 송나라 성현인 주희(주자)를 앞으로, 최치원ㆍ정몽주ㆍ정여창ㆍ이언적ㆍ김인후ㆍ성혼ㆍ조헌ㆍ송시열ㆍ박세채를 배향했다. 송나라 학자 2명을 제외한 18명을 ‘동방 18현’이라고 부른다. 성씨로는 광산김씨가 2명(김장생, 김집), 은진송씨가 2명(송시열, 송준길)로 가장 많다. 특히 김장생과 김집은 논산 사람으로 부자지간이다. 단, 동무와 서무에는 좌우를 차등하지 않고, 즉 학연이나 지연, 혈연과 관계없이 동등하게 나누어 배향한 듯하다.

내삼문과 외삼문의 서문을 통해 향교 밖으로 나오면, 학고재(學古齋)가 있다. 그 의미는 ‘학고창신(學古創新)’이다. 즉 ‘전통을 깊이 익혀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든다’라는 의미다. 논어에 등장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과 유사한 말이다. 학고재는 1999년 7월에 세운 한옥 건물로 유교 경전과 한문교육 서예교실 등을 운영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편액도 참 좋은 글씨인데, 누가 썼는지 모르겠다(면천향교의 편액은 모두 3개다. 글의 뜻과 함께 글씨 자체를 감상하는 것도 의미 있다).

학고재에는 4개의 주련(柱聯)을 매달았는데, ① 不知禮無以立也(부지례무이립야, 예를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바로 설 수 없다) ② 誣神者殃及三世(무신자앙급삼세, 신명을 속이는 자는 그 재앙이 삼대에 미친다) ③ 通於天地者德也(통어천지자덕야, 천지와 통하는 것이 곧 덕이다) ④ 行於萬物者道也(행어만물자도야, 만물가운데 실현되는 것이 도이다) 등이 그것이다. 주련은 누가 지은 시가 아니고 유교 경전에 등장하는 좋은 글귀를 모아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제향모습
제향모습

면양학교에서 오늘의 유교아카데미까지

면천향교가 지역사회에 끼친 공은 참으로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뜻깊은 것은 대한제국 시기에 면양학교(沔陽學校)라는 근대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애당초 면양학원인데, 1907년 도유사 허용(許溶)과 향교유지계장 이두영(李斗榮), 평의원 유석록(柳錫錄), 김동욱(金東旭) 등이 세웠다. 장소는 학교설립의 또 다른 주체인 면천감리교회였다. 그후 면양학원은 1908년 2월 학부대신에게서 사립 면양학교로 인가받고 면천향교로 이전하여 명륜당과 동재 서재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초대 원장은 이두영, 교사는 향교유지계총무 안인식(安寅植), 이교순(李敎淳)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면양학교는 1911년 9월 공립면천보통학교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면천향교 유림은 1919년 3월 10일 학생만세운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의 면천향교는 학고재를 활용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K-유교’를 지향하면서 매주 유교 아카데미를 성황리에 진행하고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글(文)을 가르치는 것이 ‘교(敎)’고, 말(言)을 가르치는 것이 ‘훈(訓)’이며, 글을 알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이 ‘인(人)’이고, 무지렁이로 땅에 붙어사는 사람이 ‘민(民)’이라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면천향교는 ‘민’에서 ‘인’으로 끌어올리는 노력을 묵묵히 수행하는 중이다. ‘교(敎)’와 ‘훈(訓)’을 가르치고‘충(忠)’과 ‘효(孝)’를 권장하면서 말이다(향교를 안내해주신 3.10기념사업회 유재석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