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의 완성을 위한 모든 것이 이미 씨앗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그 과정을 다 거치지 않았습니다.
사과씨는 사과나무가 되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다만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씨앗 안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틔운 것은 씨앗의 노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하느님이란 완전한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내 안에 나의 완성을 위한 모든 것이 완전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라고는 이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나의 완성은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매 순간에 그대로 순수하게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거기에 하느님이 개입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모든 과정을 자각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완성으로 나아가는, 하느님을 향해 가는 모든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완성은, 완성을 위한 성장은 부단한 고통이자 부단한 죽음, 그리고 부단한 부활의 과정입니다. 작디작은 씨앗이 웅크린 채 캄캄한 땅 속에 파묻히는 것, 그것부터가 고통입니다. 건강한 씨앗은 합당한 조건 속에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결국 터지고 맙니다. 그것 또한 고통입니다. 그것은 씨앗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 속에서 비로소 연하고 부드러운 연둣빛 싹이 틉니다. 씨앗의 죽음은 싹으로의 부활입니다. 이러한 고통과 죽음과 부활은 완성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고 계속됩니다. 그것은 중단할 수 없는 생명의 섭리입니다.
고통은 우리가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기쁨이고 선물입니다.
당진군 송산면 삼월리가 고향인 이재순(67) 노엘 수녀님은 지난 주 연중 휴가를 받아 고향집에 다녀가셨다.
강원도 태백 깊은 골짜기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베델의 집이라는 수도자교육기관의 지도를 맡고 계신 수녀님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사는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원로 수도자다운 편안함과 온유함을 지닌 개방적이고 거침없는 태도였다.
마침 이 시간에 수녀님은 안경집에서 안경을 맞추고 계셨는데 돗수 높은 두터운 안경알이 안경테에 끼워져 나올 동안 흐릿하지만 맑은 눈으로 마치 선문답을 하듯 말씀하셨다. 받아 적을 수만 있다면 그대로 한 편의 훌륭한 가르침이 될 것이었지만 인터뷰에 앞선 상견례 정도로 여기고 생각 없이 질문을 던진 터라 물처럼 자연스럽게 넘쳐흐르는 수녀님의 말을 내 생각에 다 담아낼 수는 없었다. 입춘(立春)이 지나고 막 우수(雨水)를 지난 날씨는 눈부신 봄 햇살과 겨울의 냉기가 섞여 신선하기만 한데 어디선가 마지막 겨울 얼음이 풀려 돌돌돌 흐르고 있을 것만 같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물은 겸손한 자의 골짜기로 흘러든다’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말이 수녀님의 그윽한 눈매 위로 흘러 지나갔다.
씨앗에 담긴 존재의 모든 것. 수녀님은 이것을 <참 나 designtimesp=26355>라고 이름하셨는데 이 표현에 이르러서 모든 것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나는 내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고 남자와 이야기를 하는지 여자와 이야기를 하는지 실감할 수 없었다. 이분은 노인임에 틀림없지만 어린아이처럼 맑기도 했다. 그저 텅 비고 충만하며 경건하고 생동하는 어떤 기류가 내 옆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수녀님이 말씀하신 자각, 그것은 깨달음이다. 참 나에 대한 깨달음. 그것이 우리가 이 생애동안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안경을 받아쓰신 수녀님은 거울을 잠깐 보더니 웃으셨다. “어휴 퍽도 늙었네. 마음은 그냥 있는데...” 우리의 육신이 늙어 쭈글쭈글해진다고 우리의 영혼마저 늙어 쭈글쭈글해지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유한한 우리의 육신이 종말을 향해 사그라지는 동안에도 우리의 영혼은 닦으면 닦을수록 영롱해지는 구슬처럼 닦여갈 것이다. 그리고는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부활해 진화를 거듭해갈 것이다. 우리가 육신을 건강하게 보존해야 하는 이유는 육신이 살아있음으로 해서 체험과 고통을 통해 영혼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행복이 있다고 봐요. 하나는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아무런 때도 묻지 않은 깨끗함에서 오는 행복이고, 또 하나는 이미 때가 묻게되는 어른이 된 후 단련과 수련으로 깨끗함과 순수함을 되찾는 데서 오는 행복이죠. 갓난아이들을 보세요. 지그시 눈을 감은 그들의 무심한 미소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것이 진짜 인간의 모습이에요. 마찬가지로 성화된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이들의 얼굴도 그와 같죠.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 어른이 된 우리의 어두운 모습은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니에요. 다시 순수함을 되찾아 하느님의 숨결로 인간이 숨쉬기 시작했을 때 그때야말로 행복 자체, 기쁨 자체를 살 수 있는 거예요.
결혼생활과 수도생활의 차이요? 창조주의 뜻은 결혼이에요. 수도자의 역할이란 결혼생활을 돕기 위한 특별한 부르심이죠. 수도자란 거룩한 하늘나라를 이 세상에서 미리 살며 ‘천국’이 있다는 이정표가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죠. 이정표란 여행객을 위한 것이잖아요? 결혼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힘들어할 때 수도자와 교회는 그들에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이생의 생활이 하늘을 향한 여정임을 알게 하여 불행에 안착하지 말고 궁극적인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돕는 것이죠. 그리고 수도생활과 결혼생활의 공통점은 누구나 죽을 때 혼자라는 사실이에요. 승합차를 타고 여럿이 함께 왔든, 승용차를 타고 혼자 왔든 죽음 앞에서 우리는 홀로 하느님을 만나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수도자라고 할 수 있겠죠.
수녀님은 다시 고통과 상념에 관한 대화로 넘어가셨다.
고통은 하늘을 향한 성장의 계단이에요. 나무의 나이테를 보세요. 자신을 깨고 한계단씩 성장한 아름다운 흔적이 있잖아요. 고통을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 성숙에 차이가 나는 것인데요, 고통을 잘 소화하면 하느님, 즉 완성을 향한 전진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이기적인 미성숙의 상태로 남게되는 것이죠.
마음에 상념이 떠오를 때 아. 맑은 하늘에 구름이 떠가는구나 생각하세요. 구름과 먼지도 아름다워요. 검은 구름까지도요. 그것은 자연의 성장과정이에요. 눈, 비, 바람이 자연의 성장과정 속에서 산천초목이 자라요. 마찬가지로 고통 속에서 우리가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양은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것이에요. 내 안에 참 나가 변함없이 존재하듯이 말이에요.
아픔이 떠오를 때 그것을 태양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봐보세요. 태양을 마주하고 태양에 비친 구름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오색영롱한 무지개빛이죠. 우리의 아픔도 그래요. 태양을 등진 어두운 모습 대신 태양에 비친 그 모습을 보면 아름다워요.
우리가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순간에 나의 실존과 존재 자체를 두고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에요.
순간에 사는 법은 숨쉬기에 집중하는 것이죠. 들숨과 날숨 말이예요. 들숨을 통해 우리는 매순간 탄생하고 날숨을 통해 매순간 죽고 있어요. 여기에 완전한 행복, 완전한 사랑, 완전한 기쁨의 비밀이 있어요.
부활의 봄이 다가오고 있다. 시련의 겨울은 길고도 길었다.
김태숙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