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되새겨보는 성탄의 의미

하늘의 옥좌를 버리고 예수께서 고난의 인간땅에 내려오신 날

당진감리교회 이 철 목사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신 분

그분의 정신을 본받는 것이 성탄을 잘 맞는 자세

편집자주

서양문화의 뿌리는 기독교문화다. 서양의 양력이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삼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아기예수가 태어난 날에 성탄절이라는 이름을 붙여 온세계가 기뻐하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올해는 예수가 이 땅에 오신지 2000년이 되는 해이다. 게다가 지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다. 거리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지며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누구도 올해가 서기 2000년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도 크리스마스가 어떤 특별한 날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문화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이 축제의 의미를 그런데도 우리는 애써 외면하려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계 4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부르면서도 한편에서는 종교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지나치게 신비화했다고 입을 샐쭉거리기도 한다. 한국땅이 아닌 저멀리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매년 4월8일을 석가모니의 탄신일로 기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멀리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를 기리는 것은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어떤 극치를 이루었기 때문이고, 우리가 일생을 통해 추구해 마지않는 진리를 그들이 몸소 구현했기 때문이다. 진리는 전 인류와 전 역사에 걸쳐 추구되는 것으로 나라와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는 것이다. 나라와 민족, 문화권마다 각기 특유의 문으로 들어갈 뿐 그 문 안의 진리는 하나인 것이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스승격인 만공스님은 이 세계가 하나의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세계가 한송이의 꽃이라니... 아름다운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꽃잎 한장 한장이 아니라 온전한 꽃송이 하나다. 진리를 향해 들어가는 문의 모양이 아니라 그 문 안의 진리인 것이다.

눈이 왔더라면 좋았을 12월의 중순, 아직은 우리의 남루를 가릴 사랑이 충분하지 않은 듯 눈대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당진감리교회 이철 목사님의 사택을 찾았다.

교회에서는 1년중 가장 바쁠 때임을 아는지라 어렵게 인터뷰를 청했는데 목사님께서는 이에 선뜻 응해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미안함을 덜어주셨다.

어떤 특별행사도 아니고 너무나 뻔한 성탄절을 맞아 누굴 인터뷰한다는 것이 생뚱맞아 보이기도 하겠지만 모두에게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오히려 잊혀지는 것들이 많은 요즘, 우리에게 이미 와있는 어떤 것을 다시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듯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예수가 이땅에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왜 기쁜 소식인가. 성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성탄의 현재적 의미이다. 그걸 생각지 않고 지내는 성탄이 발렌타인과 같은 상업적인 축제와 무엇이 다르랴 싶었다.

이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셨다.

“구약의 시대가 가고 신약성서가 등장하기 전 약 30여년에 걸쳐 성서역사상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때가 지나고 처음 등장한 신약성서가 마가복음인데 여기서 예수님의 문제가 최초로 등장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구약과 신약 사이의 이 30여년, 성서의 공백기에 신앙의 핵심은 바로 예수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빌립보서 2장 6절과 11절 사이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 하나님이 하늘의 옥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고 사람에게 오셨으니 그가 곧 임마누엘이다. …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서 마침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도다. …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남의 집 마굿간에서 가장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예수는 서른 세 살의 길지 않은 생애를 십자가 위에서 마감하는데 그 33년의 일대기가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서기 0년부터의 성서상의 공백기에 전개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상식이라고 해두자.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기간동안의 역사가 우리에게 고백하는 것은 그분, 즉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성탄이 귀한 까닭은 예수가 왜 왔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치적, 사업적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를 버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구원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와서 수난 끝에 억울한 반역죄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그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사랑과 용서의 삶이다.

“때문에 예수가 이땅에 오신 것은 우리들에게는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하늘의 옥좌를 버리고 온 그분 자신에게는 참으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때문에 성탄은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며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고통이 가득한 이세상에 오심을 감사하고 그 고통의 정신을 경건하게 생각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 보여진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와 먼 곳에 위대한 분으로 계신 것이 아니라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고통일지라도 그것을 외면하거나 모르지 않으시며 우리의 고통과 갈등 속에 함께 계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과 그밖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어떤 특별한 조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우리의 삶 자체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설 때 우리는 서로에게 연민을 가지게 되고 갈등과 투쟁 대신 용서와 화해, 공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막 토막, 때로는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이목사님은 ‘구도자’라는 표현을 종종 쓰셨다.

목회자 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과 참답게 살려고 애쓰는 우리 모두가 구도자라는 것이다.

“자기를 비우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 못지않게 기독교도 자기비움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모범으로 평생 자기를 비우는 연습을 하다가 나중에 아주 비우고 죽는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를 비우지 않고 남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목사님은 ‘하나님은 아마도 생의 노화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우게 하신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젊음도, 부도, 명예도 영속되지 않음을 통해서 말이다.

김태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