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열봉지 보다 더 좋은 약, 마주잡은 손에 따뜻한 말 한마디

“오늘은 좀 어떠세요?”

병원없는 오지마을의 움직이는 ‘병원’, 백석보건진료소 정 희 숙 보건진료원

사람의 병은 몸보다 마음에서 먼저 온다. 체질적으로 약골이거나 태생적으로 약하게 타고난 부위가 있을지라도 병은 심한 스트레스나 좌절, 불안으로 생기와 저항력을 잃은 상태에서 찾아온다. 병보다 심리적인 장애가 앞서 발생하는 것이다. 병의 치유 역시 몸보다 마음에서 먼저 일어난다.

독실한 크리스찬이면서 의사로서도 대단한 명성을 얻었던 이상구 박사는 그 유명한 “엔돌핀과 T임파구”이론으로 이것을 설명했고 미국에서 직접 치료센타를 운영하며 알콜중독자와 여러 만성질환에 시달려온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재활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의 이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기분이 좋아지면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왕성해져 우리 몸 속 생명력과 치유력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T임파구의 활동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성질환자들은 “병”자체를 물리적으로 치료하는 데에만 전념할 뿐 그 병의 간접적인 원인인 환경과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두기 때문에 병의 치유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요즘에 와서는 이런 심리적인 요인을 중요하게 여겨 음악치료 요법이나 미술치료, 무용치료를 물리적인 치료와 병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너무 거창하게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위안’에 갈근이 나 있는 사람에게 단 한마디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것처럼 마음 속 쓰라린 곳을 어루만져 주는 한마디의 말로 충분할 수 있다. 게다가 그것이 평소 기대고 싶었던 사람에게서 주어지거나 일정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환자는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얻어 병에 대처하는 능력이 향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치료는 그러한 것이다. 환자 스스로 자신의 병에 대처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응원해 주는 것이다.

최근에 보건복지부가 지역보건소를 통해 하고 있는 ‘가정방문 간호’는 주민들에게 직접 가까이 다가가서 제공하는 보건서비스로 꽤 괜찮은 취지를 담고 있다. 특히 병,의원 의료서비스에서 소외된 오지마을 주민들은 보건진료소를 통해 훨씬 가까운 서비스를 받고 있다. 군소재지에서도, 면소재지에서도 멀기만 한 이런 마을에서 흰 까운을 입고 집으로 왕진을 오는 ‘보건진료원’들은 주민들에게 나이팅게일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순성면 백석리 <백석보건진료소 designtimesp=17294>에서 하루 24시간 마을 주민들의 건강을 관리하고 있는 보건진료원 정희숙(41세)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백석리와 나산리, 등 인근 4개마을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평소에는 의사처럼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보지만 밖으로 왕진을 나가는 일도 적지 않다. 게다가 매주 목요일은 직접 환자들을 방문해 간호하는 날이다.

시간을 따로 정해놓지 않았어도 저녁시간이 되면 급한 환자 말고는 발길이 멎지만 하루 24시간 주민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 그녀의 직무다. 어떤 날은 밤에, 어떤 날은 이른 새벽에 진료를 해야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 마땅히 해야할 일이고 하기로 마음먹은 일이기도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 더구나 가정을 꾸리고 있는 주부이자 엄마로서 벅찬 것도 사실이다.

백석리 마을회관 옆에 파란 지붕을 얹은 작은 단층집이 그녀의 일터이자 거처인 <백석보건진료소 designtimesp=17298>다.

여느 작은 병원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공간 안에 진찰실과 주사실, 제약실이 고만고만하게 붙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모든 일을 혼자 해야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마을 환자의 등록과 관리, 그리고 보험청구를 위해 사무관리도 해야한다. 밤에 급한 환자가 없어도 이 진료실에 나와 야간 사무작업을 해야하는 날도 더러 있다. 그런 날에 제일 미안한 것은 정씨를 위해 천안 출퇴근을 마다않는 남편과 시골학교 4학년에 다니는 외동딸을 쓸쓸히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료실 안쪽에는 환자 대기실로 쓰는 응접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는 손바닥만한 주방과 세식구의 조그만 살림방이 있다. 한 공간안에 있는 일터와 거처, 이 불분명한 경계를 넘나들며 공과 사를 뚜렷이 구분짓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얀 까운을 걸치고 진료실로 나가는 간단한 절차만으로도 ‘출근’이 되도록 정씨의 생활과 마음은 오랫동안 훈련이 되었다. 부산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병원 간호사 생활을 7년쯤 한 뒤 결혼으로 잠시 일을 쉬었던 정씨는 다시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시골가서 살고 싶기도 해서 보건진료원 교육과정을 다시 밟았다.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고 치료사도 아니지만 사실 의사역할, 간호사 역할, 치료사 역할을 다하는 것이 보건진료원이다. 의료행위의 단계로는 1차 응급의료에 속한다.

외딴 섬의 엄청 어려운 의료여건 속에서 주민들과 말그대로 한솥밥을 먹다시피 한 시절을 거쳐 서천군을 경유해 순성면 백석리로 온 것이 벌써 5년째다.

초등학교에서도 4킬로미터나 떨어진 오지에다 물건 하나를 사자고 해도 멀리까지 쇼핑을 가야하는 것이 불편이라면 불편일까, 정씨는 한적하니 들뜨지 않고 안정감 있는 이 마을이 좋다. 어쩌면 그것은 이 마을에 오던 첫날, 마을 어르신들이 보여준 인정때문인지도 모른다. 제법 쌀쌀해지던 때였건만 마을 어른들은 새 ‘선생님’이 온다는 얘길 듣고 이삿짐을 거들기 위해 마을회관에서 몇시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디 잔치집이 있으면 국수 한그릇 나눠 먹자고 거리낌없이 연락해 오고, 김장을 하면 김장김치 나눠주는 그 인정이 정씨에겐 따뜻하기만 하다.

이따금 며느리와 다투고 하소연할 곳이 없는 할머니가 찾아와 넋두리를 하고 가기도 한다. 할 일이 태산 같을 때에도 그것을 물리칠 수 없는 것은 그 역시 건강을 돌보는 일 중 하나인 까닭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정방문을 주민들은 가장 반긴다. 하얀 까운을 입고 방 문을 들어서며 “오늘은 좀 어떠세요?”라고 묻는 말과 다정하게 잡아주는 손이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은 그중 좋은 것이다.

“저도 이일이 좋습니다. 제 꿈이었던 유치원 교사 말고는 가장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제 딸이 엄마를 존경한다는 것도 다 이 직업 덕분 아니겠어요?“ 정씨는 말갛게 웃는다.

김태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