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혼기의 인생을 걸쭉한 재담과 왁자지껄한 웃음판으로 신명나게
깊지 못한 생각의 소치
지난 주말엔 가을비가 억세게도 내렸다. 토요일 오후 들어 어둑한 하늘이 쏟아내는 빗방울은 장마철의 폭우만큼이나 굵고 세찼다. 왜 이러나, 논이며 과수원이며 하다못해 작은 텃밭의 알곡들이 그 주인네들의 시름 따라 기어코 떨어지려나, 샛길과 고샅에 말 같은 처녀의 불그스레한 볼 같은 코스모스 꽃잎도 볼품없이 흙 속을 뒹굴려나, 아무 데도 운신을 못하고 까닭도 없이 이런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월요일. 과수원의 사과도, 논의 벼도, 길가의 코스모스도 그대로였다.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코끝을 맹하게 했지만 까닭도 없는 걱정들이 걱정으로만 주저앉아 버린 게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찼는가 싶으면 기울고 기울었다 싶으면 다시 차오르는 달처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 지나 봄이 오면 성큼 여름인 것이 계절의 속성이다. 지난 여름 굵은 장대비를 견뎌냈던 알곡들은 아무리 가을비가 억셌더라도 상할래야 상할 수 없었건만 지레 걱정을 떠안았던 건 깊지 못한 생각의 소치였다.
우강면 강문리로 새집을 짓는 노인들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다. 새집이라……이채롭고 생소하긴 했었다. 그러나 인생의 저물녘에 닿아있는 그네들의 소일거리로만 생각했지 그 속에 숨어있는 가치는 선뜻 다가와주질 않았다. 사소하든 의미심장하든, 자그마하든 거대하든,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가치 말이다.
새집 짓는 노부부를 찾아
도로 양쪽으로 넓게 누워있는 들판은 고개 숙인 벼들로 노랗게 불타고 있었다. 들판을 어루만지는 바람소리는 노래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처럼 그윽하고 아늑했다. 우강면 강문리 이장인 둘째 아들 임승선씨와 함께 사는 임풍호(89)·하영순(76) 노부부를 아름답고도 아름다운 가을 들판에 둘러싸인 집 마당에서 만났다.
어른 주먹만한 새집은 짚으로 만들어진다. 임풍호 할아버지가 새끼를 꽈서 새집의 틀을 만들어주고 짚을 추려주면 그 틀을 따라 짚으로 엮어 새집을 짓는 일은 하영순 할머니의 몫이다. 새벽 5시 즈음 어스름 속에 저절로 눈이 떠지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작업은 끊임이 없다. 1개에 5백원 하는 새집이 한 달이면 1천개 정도가 만들어진다고 하니 두 분의 월급은 50만원 정도인 셈이다.
그만하면 두 분의 씀씀이엔 부족함이 없는 돈이다. 손주들의 먹거리를 위해 자식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손을 벌릴 필요도 없다. 두 분의 한달 벌이는 손자·소녀들의 손에 후한 용돈으로, 둘째 며느리 박보물(47)씨의 부엌에 요즘 인기라는 김치냉장고로, 돼지머릿고기와 술 등 두 분의 간식거리로, 그리고 두 분의 보금자리가 될 묏자리를 마련하는 데 쓰여진다. “우리 어머니가 새집지어서 김치냉장고 사줬슈. 요새 시어머니에게 김치냉장고 선물 받는 며느리가 몇이나 되겄슈. 두 분 손을 볼 때마다 김치냉장고 쓰기가 어렵고 또 아깝기도 하쥬.” 며느리 박씨는 옆에서 시부모 자랑에 입이 바쁘다.
90여년 묵직한 인생의 명료한 진리는...
내일 모레면 아흔이 되는 임풍호 할아버지는 언뜻 60대 전후로 보일 만큼 정정하기가 한 겨울 푸른 소나무 같다. 마을에서 최고량자인 할아버지의 건강비결은 의외로 간단하고 단순했다.
“술 잘 먹고 밥 잘 먹는 게 비결이지, 뭐 다른 게 있나. 그런디 술은 먹되 딱 한잔씩만 먹어야 혀. 그게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길이지.”
어찌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할아버지의 대답이 그야말로 여느 도인 못지 않은 걸작이다. 서로가 귀한 줄 알아라, 그러면 서로 위해줄 테니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지 않겠느냐, 한 겨울 함박눈이 쌓여 마른 나뭇가지가 탁, 하고 부러지는 소리처럼 할아버지의 답은 딱 떨어지고도 남음이 있다. 나무에 눈이 쌓이고 쌓여 눈꽃으로 피듯이 할아버지의 답엔 90여년의 묵직한 인생이 품어온 명료한 진리가 숨어있었다.
걸쭉한 재담과 왁자지껄한 웃음판
마을엔 임풍호 할아버지와 하영순 할머니 외에 새집을 짓는 노인들이 몇 분 더 있는데 지난해에 혼자 되신 전만열(68세) 할머니 댁의 작은 방에 속속들이 모여 함께 새집을 짓는다. 100m정도 떨어진 전만열 할머니 댁에 할아버지는 20년 된 자전거를 거뜬히 타고 바람처럼 휑하니 날아가고 다리가 편치 않은 할머니는 며느리의 오토바이에 의지해 간다. 여든 아홉 되신 할아버지가 가뿐히 자전거 페달을 밟는 모습이라니... 그때 가을볕 아래 누렇게 탄 논들이 유독 넉넉하게 보였던 건 할아버지의 정정한 뒷모습 때문이었던 듯싶다.
날마다 보는 얼굴이라 달리 할 말이 없을 듯싶은데 노인 분들의 입에선 걸판진 재담들이 앞다투어 쏟아진다. 한쪽에서 넌지시 운을 띄우면 저쪽에서 받아치고 이쪽에서 굴려 종종 지붕이 들썩거릴 정도로 웃음판이 벌어진다.
“어이, 젊은 기자양반. 영감 있으면 하나만 해줘. 여기서 짝꿍이 나만 없잖여. 늙어서 혼자 사니께 시시허고 쓸쓸허네, 그려.”(전만열)
“어허 참, 처음 보는 젊은 양반한테 염치없이 그런 말을 어떻게 한댜.”(임풍호)
“못할 건 뭐유. 혹시 알어. 근력 좋은 영감하나 얻어줄지.”(하영순)
재담에 은근슬쩍 끼어들어, 지가 영감님 한 분 해주면 지한테도 예쁜 색시 하나 떨어진대유, 하고 농을 받아넘겼다.
“흐흐, 기자양반 말 품세 좀 보게나. 색시 못해줄 것도 없지. 그런디 시원찮은 영감은 한 다시를 줘도 안 받어. 젊은 양반만큼이나 팔팔혀야혀.”(전만열)
새집 짓는 일의 가치
새집을 짓다가 지치면 윷을 놀기도 하고, 시장기가 느껴지면 넉넉한 주머니를 털어 먹고 싶은 것을 사다 드신다. 해가 뉘엿뉘엿 산 너머로 질 즈음이면 동동주나 소주 등 약주 한 잔씩 걸치고 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네들의 얼굴에선 지친 기색이나 피곤기, 무력감 등이 읽혀지지 않았다. 오래된 밭의 이랑만큼이나 깊게 패인 주름살들이 휘어지며 지어내는 웃음은 청춘과 젊음을 잃었다해도 추수가 끝나 비어버린 들판이나 휑뎅그렁한 하늘처럼 보이진 않았다. 한결같이 즐겁고 밝은 표정이었다. 노인네들이 이렇듯 즐겁게 지내니 다른 동네에서 부러워할 만도 하다.
그네들이 나뭇등걸 같은 손과 마른 살갗으로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프고 엉덩이가 배기면서 짓는 새집은 새들에게 있어선 둘도 없는 보금자리가 된다. 나일론실이나 플라스틱 같은 재료로 지어진 새집은 새들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한다. 언제 저런 아무 것도 아닌 짚들이 새집이 될까 싶은데 10분이 채 못돼 노인들의 잰 손놀림은 번듯한 새집 한 채를 지어낸다. 노인들이 지은 새집을 터로 얻은 새들은 그 속에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 새집에서 들려올 새끼들의 새근새근한 숨소리는 거짓과 속임, 폭력과 사기, 시기와 방편들이 난무하는 세태에 견주어보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그네들의 저무는 인생은 다시금 다른 생명체에게 삶의 길을 터주고 있는 것이다.
이희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