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직까지 소원이 있다면 말여,
그건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잘 사는 거여.
장애인, 그늘진 청소년들, 독거노인, 문맹자, 결식아동들
주위를 보면 아직도 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숱허거든.”
연거푸 새벽을 열어야 했던 그 소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잉크를 팔아 삶의 허덕임을 가까스로 이겨내던 소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등록금 대신 밥값이 더 절실했기에 학교 언저리에서 등교하던 동년배들의 중학교 모자에 부풀대로 부푼 부러움을 싣던 소년. 그 소년은 끝내 보리 한 자루를 등에 진 채로 친구의 손을 잡고 인천으로 떠났다. 그 보리 한 자루는 소년의 손에 연필 하나 쥐어주지 못했던 집에서 고학하겠다며 인천으로 떠나는 아들의 손에 쥐어준 유일한 생활비였다. 소년의 등에 업힌 보리 한 자루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여물지 못한 여린 등을 짓눌렀을 그 보리 한 자루에는 소년의 꿈이 몽땅 실렸을 것이니 고향을 등지는 소년의 발걸음은 짐짓 가벼웠을는지도 모른다. 혹, 그것은 동년배들의 중학교 모자보다 더 가벼웠을지도.
장사치로 험한 곳을 누볐던 소년에게 인천은 별세계였다. 하늘의 별빛을 무색하게 했던 상점의 불빛들과 거미줄처럼 얽힌 갈래 갈래의 골목길들이 소년은 어지러웠다. 그 어지러운 골목길의 어느 모퉁이에 겁먹은 쥐처럼 엎드려있던 허름한 판잣집이 친구의 자취방이었다. 친구의 집에 얹혀 살아야했지만 소년은 슬프지 않았다.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크나큰 학비와 친구가 남긴 찬밥이 소년의 가슴에 짙푸른 멍을 새겨놓았지만 소년에게 절망이란 없었다. 아니, 절망할 겨를이 없었다. 중학교 모자를 계속 쓰기 위해선 신문을 돌리며 졸린 눈으로 연거푸 새벽을 열어야 했으니. 가끔, 그래 이따금씩 불야성의 항구에서 산울림처럼 울려오는 뱃고동소리가 소년의 가슴을 무두질하며 지나갔을 것이다. 외롭고 고난 했던 소년의 가슴에 희망의 소리를 울리며. 부웅, 부우웅, 낮고 또 길게 소년을 위로하고는 어두운 하늘의 그 어딘가로 날아갔을 것이다. 고향을 등지던 바로 그때의 소년처럼.
아직까지 소원이 있다면
그 소년. 시린 손으로 새벽을 들어올려야 했던, 얼음밥을 씹어 먹어야 했던 그 소년은 이제 예순 아홉이 돼 황혼을 바라보고 있다. 당진읍 대덕리의 송재선씨. 그의 황혼의 꿈은 힘들게 배움의 길을 걸었던 유년시절을 보듬는다.
“아직까지 소원이 있다면 말여, 그건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잘 사는 거여. 장애인, 그늘진 청소년들, 독거노인, 문맹자, 결식아동들……주위를 보면 아직도 험하게 사는 사람들이 숱허거든.”
그가 꿈 얘기를 꺼낸 것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얘기한 후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네”하며 눈시울을 붉혔지만 꿈을 얘기할 때 그의 눈에선 빛이 흘렀다.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꿈인 사람도 있다. 충분히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 평의 땅을 더 늘리고 수치로 계산한 재산에 ‘0’하나를 더 붙이는 게 꿈인 사람도 있다. 소유와 욕망을 섬기는 자들의 꿈에 견주면 그의 꿈은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원대하다.
“아주 조그맣고 또 조그만 거여”
백가지도 넘는 직업을 거치며 만고풍상을 겪은 그다. 지난 35년간 무, 배추 장사로 전국을 돌며 밭떼기 장사를 해온 그다. 힘겨운 삶의 굴곡을 헤쳐와야 했던 그는 지난 추석 즈음, 자신의 오랜 한을 어느 정도 풀었다.
“추석 전까지 맘잡고 약 40일 동안 전국을 돌아다녔어. 밭떼기 장사로 매년 전국을 140회 이상 돌아서 시간이 좀 걸렸지 그리 힘들진 않았어. 전국농산물 유통인 중앙연합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과 학생들의 명단을 구하기는 쉬웠지. 전국적으로 망이 다 깔려있으니께 전화 한 통이면 금방 구해졌거든. 고학하는 학생들에겐 책이나 문방구를 돌렸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한테는 조그만 선물을 줬어. 아주 조그맣고 또 조그만 거여. 전국을 도느라 우리 아들 내외도 고생 좀 했지.”
아비의 뜻을 따르느라 그의 큰아들 내외는 당진읍 대덕리에서 운영하고 있는 맥섬석찜질방의 문을 한달 넘게 닫아야했다. 그의 선행은 아주 우연찮게 알려지게 됐다. 택배로 선물을 보낸 곳도 있는데 발송인 전화번호가 화근이었던 것이다. 신분을 감추기 위해 어떠한 연락처도 기입하지 않으려 했지만 택배회사 직원의 독촉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화번호만 간단히 기입한 것이었다. 반송될 경우에 대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 전화번호가 결국은 감추고자 했던 그의 선행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54년을 묵은 그의 꿈
아무나 가질 수 있지만 누구나 보듬을 수는 없는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그의 꿈. 그 꿈의 연원은 무엇일까. 고학했던 시절, 인천에서 ‘한국일보’를 돌리던 그 어린 소년이 답을 갖고 있었다.
“이것도 눈물나는 얘기네. 지금도 잊지 않어. 동양방직주식회사의 총무계에 근무하던 여직원이었지. 신문사 지사장이 나를 잘 봐서 신문대금을 걷는 일도 맡겼는데, 그 여직원이 신문대금을 두 배로 주는 거여. 왜 그러냐고 했더니, 고학생 같은데 노트 한 권이라도 사서 쓰라더만. 또 허름한 어느 부두노동자도 신문대금에 웃돈을 얹어주는 거여. 학비에 보태쓰라고. 그때가 내 나이 열 다섯이었어. 그 어린 마음이 어땠겄는가. 아름다운 그 사람들의 한 마디에 평생을 걸게 된 거여. 그 꿈이 한이 되고 또 한이 됐지.”
그때 그의 나이 열 다섯, 지금은 예순 아홉, 생각하면 54년을 묵은 꿈이다. 그 절실함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올해 선행을 베푼 것은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일이 아니었다. 유년의 그늘이 50여년을 묵고 묵어 비로소 숨을 내쉰 것이었다. 빚을 지고 있다는 그다. 그의 선행은 재산이 넉넉해 남는 풍요를 나눈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각양각색이여. 40여년을 김밥장사 해 모은 12억원을 장학금으로 내놓는 사람도 있고, 몇 십억을 갖고 있으면서도 10원 한 장 없는 사람들의 돈을 뺏으려는 사람도 있어. 지난 여름에 강원도 수해현장을 가봤더니 3백억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집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사람이 없어. 오히려 판잣집에 사람이 넘쳐났었지. 고무줄이 어떠한가 말여. 잡아당기면 끊어지고 그대로 놔두면 용케 쓰잖여. 재력, 권력, 돈……맘만 비우면 편해져. 빌딩 꼭대기 보면서 어떻게 사나, 앉은자리 지키면서 보람 느끼고 사는 게 바른 인생이란 말여.”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지난 1996년 뉴욕한인청과상조회의 초청으로 전국농산물 유통인 중앙연합회 임원들과 함께 미국을 찾은 그는 장애인을 위해 쓰라며 2천달러를 남몰래 기증했다. 무릎디스크를 앓아 몸이 불편하던 그는 유난히 장애인들이 맘에 걸렸던 것이다. 마침 추석 즈음이었고 수만 명의 재미한인들이 모인 가운데 뉴욕에서 추석행사가 행해지던 때 단상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졌다. 2천달러를 전달받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밝혔던 것이다. 행사가 끝난 후 기자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 큰 행사에 봉사금을 기증한 사람이 그, 단 한 명이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이 시대의 성냥팔이 소녀는 어디서 크리스마스를 보낼는지. 빛이 찬란할수록 어둠은 두껍고 깊어진다. 마찬가지로 어둠이 두터울수록 한줄기의 빛이 주위를 밝힌다. 고요하고 거룩한 밤에 추위 속에 놓여있을 성냥팔이 소녀를 기억하자. 이젠, 찬란한 빛에 가려져 있는 어둠으로 눈을 돌리자. 그 어둠에 소박하지만 위대한 한줄기 빛을 밝혀놓자.
이희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