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글을 쓴다!’ 디지털 미디어의 시대에 벼루에 물을 붙고 정결한 마음가짐으로 갈아 만든 먹에 붓의 깃을 적셔 날카롭게 만든 뒤 새 하얀 화선지 위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때론 비효율적인 모습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문자를 단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고 때문에 발생하는 편향적인 생각이다.

‘서예’에서는 글자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만이 아니다. 서예에는 글자에 새겨진 의미를 탐구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받아들이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글을 쓰다보면 내 맘대로 써지지 않아 획이 굵어지기 일쑤고 마음이 흔들리면 붓도 흔들려 원하던 글씨는 나오지 않는다.

정보의 홍수시대란 곧 ‘문자의 홍수’ 시대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시기에 서예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문자가 기록되어있는 책과 신문, 그리고 인터넷 정보를 접하다 보면 수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지만 그 정보의 참뜻을 헤아리기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글자는 많다고 해서 지식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몇 글자이더라도 그 참뜻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된 지식이 된다. 수없이 많이 ‘정직해라’, ‘솔선수범해라’ 소리를 듣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스럽게 화선지 위에 ‘정직’이라는 글자를 옮겼을 때 글자의 의미는 쏟은 정성만큼 마음에 담겨진다.

내가 옮겨놓는 글자는 비록 두 글자에 불과하지만 그 의미만큼은 글자에 몰입해 있는 동안 많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노(老)교사의 설명이다. 순성초등학교 미술실에서는 이상범 교사의 서예교실이 한창이다. 군용담요 위에 아이들은 먹과 벼루를 올려놓고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갈아 만든 먹을 이용해 화선지 위에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고 있다.

밀레니엄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2000년도에 합덕초등학교에서 34년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정년퇴임을 했던 이상범 교사는 41년 생으로 올해 나이 65세의 노(老)교사이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아이들에게 서예가 갖는 참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老)교사의 ‘글씨 지도’는 계속되고 있다. 서예의 모든 것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에 먹을 가는 법에서부터 글씨 쓰는 법까지...

노(老)교사의 손에는 먹물이 마를 날이 없다. 그래도 노(老)교사가 이 일에서 손을 때지 못하는 것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획을 그으며 글자를 써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견하기 때문이다. 또 서예를 하는 학생 대부분이 공부도 잘 한다는 주위 선생님들의 칭찬에 노(老)교사는 그저 흐뭇할 뿐이다.

좋은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서화협회가 지난 5월25일 개최한 제5회 대한민국학생미술대전 서예부문에서 이상범 교사가 지도한 김지혜·박소현 학생이 금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해 15명의 학생들이 입상했고, 지난 4월25일 서울 88학생체육관에서 열린 제14회 전국학생서예백일장에서는 김아람 학생이 대상을 차지하는 등 경사가 겹치면서 그야말로 순성초등학교는 서예열풍에 푹 빠져 있다. 이날 순성초등학교를 찾았을 때에도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방과 후 노(老)교사의 지도를 받으며 붓글씨를 쓰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상범 교사는 “각종 서예대회에서의 좋은 결과보다 아이들이 글씨를 참뜻을 이해하고 실력이 늘어 갈 때가 더 보람 있다”며 “순성초등학교 신영호 교장과 각반 담임선생님, 그리고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아이들이 서예가 갖는 참뜻을 체험하고, 좋은 성적도 낼 수 있었다”면서 이들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 교사에 따르면 농촌학교 아이들이라도 학원에 가야하고 놀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고 한다. 또 서예를 시작한 초창기에는 서예지도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것에 대해 부인으로부터 불평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노(老)교사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김항룡 기자 hrkim@djtime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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