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성아파트에서 바라본 당진읍내 전경.
▲ 한성아파트에서 바라본 당진읍내 전경.

자치개막과 더불어 늘어났던 전입인구 98년부터 다시 썰물처럼 밀려나가

1. 당진군 지방자치 10년의 틀거리

지방자치 원년인 1995년, 당진지역 정치와 경제의 중심부는 뜨거웠다. 6.27 선거에서 초대 민선군수가 선출되었고, 그보다 4일 앞인 6월 23일에는 한보철강 당진 제1공장의 준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첫 민선군수를 향한 열망과 기대는 결국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충남의 자민련 바람이라는 구태의연한 지역감정 기반 위에서 치러졌음이 드러나 많은 주민이 낯을 붉혔고, 개발의 부작용과 특혜성장에 대한 우려 속에서도 지역경기 부흥의 공신으로 일견 기대를 모았던 한보철강 당진공장의 준공식은 마을방송과 차량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주민초청과 선물공세로 결국은 난리법석 속에서 음식물을 집어던지고 사람이 깔려 다치는 등 낯 뜨거운 현장이 되고 말았다.

뜨거운 기대 혹은 뜨거운 논란 속에서 시작돼 낯 뜨거운 절망감 혹은 낭패감으로 일단락된 이같은 중심부의 사건들 못지않게 95년에는 어느 해보다 놀랄만한 사건들이 많았다.

1개 면단위의 집단시위로는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될 정미면 수당리 주민들의 사설공원묘지 반대시위는 마을주민들이 일제히 70정보에 이르는 논의 모내기를 포기해버리는 데까지 이르렀으며 여름의 막바지인 8월말에는 만 나흘 동안 퍼부은 비가 당진군 관내 주택, 농경지, 도로, 공공시설 등을 강타해 223세대 508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가옥, 수리, 농경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53억의 피해를 입혀 재해안전대책의 허점을 드러냈다.

농지용 매립에서 공단용지로, 중부권특정폐기물처리장 후보지로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온 석문공단부지는 충남도가 대기업입주를 위해 은밀히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고 해서 또 한번 파문이 일었다. 바다를 막고 갯벌을 매립해 농지용 간척지로 만들어졌다가 일부가 공단부지로 용도 전환된 채 지금까지 염분성 수초와 잡초로 덮여 마치 야생의 늪을 연상케 하는 텅 빈 석문간척지는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쭉 뻗은 방조제와 함께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지난하기만 했던 이 지역 1980년대와 1990대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토록 길고 세밀하게 1995년의 지역풍경을 묘사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어쩌면 2005년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가능성과 문제가 `95년도의 단상들 속에 이미 잠재해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소 비약해서 그 시작과 끝을 말한다면 다름아닌 한국형 지방자치의 한계와 질곡이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동안 엄청나게 달라진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현상들과 그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억눌렸던 민원과 분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하지 않고 있는 그 관계, 그 구조들이다.

2. 지방자치 10년, 당진군 인구변동의 추이

이 10년 동안 당진군의 인구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을까? 일반적으로 지방자치의 기점은 1995년으로 보지만 여기서는 1995년에 나타난 인구변동의 역동성을 유기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조사의 기점을 1993년으로 잡았다.

당진군은 충남에 있는 15개시군 중 군 단위로는 제법 큰 면적규모와 인구를 자랑해왔다. 농업군이면서도 해안에 인접해 있어 뻘과 바다의 자원으로도 살아가는 전통적인 반농반어지역이었다. 인구 1인당 경지면적과 쌀생산량도 전국 수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며 한때 전국 쌀생산량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정부가 국토균형개발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수도권의 공해산업을 분산할 목적으로 서해안일대의 바다를 막고 갯벌을 매립해 인위적으로 땅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당진군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격변을 맞게 된다. 생계대책은 고사하고 해안과 내륙 곳곳에서 이재에 눈밝은 사람들의 보상을 둘러싼 이전투구와 반목, 비리가 난무한 가운데 농촌과 어촌, 그 공동체들이 붕괴되었다. 눈먼 보상금을 챙긴 사람들과 눈뜬 채 코를 베인 사람들 모두가 하나씩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80년대 이농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1980년대에 13만 인구를 자랑하던 당진군은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 <표>와 같이 1993년에는 12만1천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93년과 94년에 보이는 점진적인 인구변동율의 증가와 전출인구의 증가는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다.

그런데 지방자치의 기점이라고 하는 1995년의 인구변동은 매우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전의 해들과는 다르게 전입인구가 전출인구에 비해 확연히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3년간 당진군의 인구는 이례적으로 늘어났다. 이 시기의 눈에 띄는 인구증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지방자치제의 본격적인 실시라는 정치적 환경과 그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고향으로, 혹은 지역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을 것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한보철강 당진공장 가동에 따른 산업고용인구의 증가가 자연히 동반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마 두 가지 요인이 다 작용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출인구가 다시 늘어나고 총인구가 반대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 또한 1997년에 일어난 한보철강 부도사태에 따른 여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구변동이 매우 일시적이었던 것은 지방자치제 실시 후에도 여전히 사회간접자본과 산업 및 고용여건, 교육 및 문화환경이 개선되지 않은 지역의 상황과도 맥을 같이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1995년에 12만2182명이었던 당진군의 인구는 시기별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다가 2003년 11만명대까지 줄어든 후 10년만인 2005년말에 이르러서야 12만2016명으로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2005년 인구현황기사 참조).

한편 5년마다 실시하는 농업총조사 보고서의 1995년분과 2000년분을 보면 당진군의 농가인구는 1995년에 이미 총인구의 50% 미만으로 낮아졌으며 그나마도 그 뒤 5년 사이에 7%, 즉 1만명 가까이가 더 줄어들었다.

3. 인구변동으로 보는 격동의 10년

당진군의 격동적인 변화는 인구지표 하나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결코 단순한 변인에 의해 점진적으로 변화해오지 않았다. 농촌의 피폐화와 공동체의 해체로 대변되는 1980년대의 지역사회 변동은 1990년대 중반의 지방선거와 한보특수 및 한보한파, IMF를 연이어 거치는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더욱 구체적인 불안정 상태로 접어든다고 보아진다.

즉, 지역사회 안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내부의 전통과 외부의 도전, 보수와 혁신, 억압과 표출 등 상대적인 측면들이 조정과 수용이라는 과정을 거칠 여유없이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대립 내지 충돌로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로 지역사회가 유지되어왔다는 말이다. 우리사회 민주주의의 짧은 경험과 역사로 인해 사회의 조정기능과 조정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속된 이러한 팽팽한 대립과 긴장이야말로 당진이라는 지역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이끌어온 동력이자 한계였다.

당진군의 경우 이러한 문화격돌은 근본적으로 지역사회의 변화가 주민의 의지나 의사와는 무관하게 진행된 데다 그 과정에서 문화와 공동체의 처참한 해체과정을 겪도록 강제한 전근대적인 정부의 일방적인 지역불균형정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진시대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