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 첫번째

내 아내 박용자는 8남매 집안의 장남인 나에게 시집을 와 숱한 고생을 했다. 시집올 당시 동생 일곱에 부모님, 할머님, 오갈 데 없던 사촌까지 열세식구가 한 집에 살았으니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단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어머님은 마흔아홉에 혈압으로 쓰러져 그 후 11년을 앓으시다 예순을 못 넘기시고 돌아가셨다. 아버님도 예순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러는 바람에 아내는 일곱 동생의 뒷바라지를 맡아서 해야 했다. 막내동생과 나와의 나이 차가 25년이니 자식 같은 시동생들을 줄줄이 건사했던 것이다.

첫 번째 사진은 아내의 고생길(?)이 시작되는 시점의 사진이다. 당진읍내 모처에서 약혼식을 치르고 둘이서 오붓하게 산책을 하는 장면이다. 뒤에 보이는 건물은 당진성당의 옛건물이다. 내 옆에 서 있는 나무는 지금도 건재해 보호수로 지정된 당진성당 은행나무다. 공주가 집인 아내는 이날 장인 장모되실 분들과 버스를 타고 여섯 시간을 달려 당진에 왔다. 한복을 차려입고 머리도 곱게 단장한 스물여섯의 약혼녀와 마냥 기분좋았던 스물여덟의 내 모습이 풋풋한 추억으로 다가온다.

두 번째 사진은 그로부터 1년 후. 당진군청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다. 1972년도 10월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시작됐던 당시 정부에서는 근검절약을 강조하면서 관공서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권장했다. 마을 반장일을 보고 있던 나는 정부정책에 따라 군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곳은 당시 회의실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는데 지금의 종합민원실자리로 기억된다. 주례는 원래 군수님이 맡아주기로 했는데 갑작스럽게 일이 생겨 당시 당진읍장이었던 김영규씨가 서 주었다. 전면휘장에 이동예식장이라고 쓰인 글귀와 단상 위에 걸려있는 만국기가 재밌다. 아내는 이렇게해서 나에게 시집을 왔다.

세 번째 사진은 변변한 여행 한번 가보지 못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대공원에 놀러가 찍은 사진이다. 대공원이 처음 개장했을 당시로 기억한다. 지금 두 아들은 어느새 결혼을 해서 사진 속 내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두고 있다. 큰 아들 내외는 우리 부부와 함께 살고 있는데 방을 얻어준다고 해도 ‘집놔두고 왜 나가느냐’며 부득부득 버티고 있다. 덕분에 우리 내외는 손주녀석 보는 재미로 심심한 줄 모르고 살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대견한 건 우리 며느리다. 종가집이어서 일년에 제사만 여덟 번인데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아내는 지금 송산면 생활개선회장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다. 내가 이장으로 활동하던 때를 살짝 비껴서 마을 부녀회장도 두 번이나 했었다. 지금 하는 봉사활동은 가족들 뒷바라지보다 한층 더 의미있고 보람찬 일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좀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도록 배려하는 것, 그것이 고생한 아내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