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2년에 발굴된 32기의 목이 없는 순교자의 묘들 중 하나. 이름 없는 노란 들꽃만이 키 작은 십자가를 감싸고 있다.
▲ 1972년에 발굴된 32기의 목이 없는 순교자의 묘들 중 하나. 이름 없는 노란 들꽃만이 키 작은 십자가를 감싸고 있다.

역사의 지층에 묻혀 있었던 다블뤼 주교관과 순교자들의 묘

다블뤼 주교와 그를 따르던 신자들의 죽음

지나간 역사의 자취를 더듬는 일은 언제나 숭고하다. 또한 그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를 현재로 되돌려 있는 그대로 살아볼 수 없고 다만 눈먼 장님처럼 더듬을 수 있을 뿐이므로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숭고함과 안타까움, 이 간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재의 우리를, 또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뿐이다. 아니,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시간의 지층에 깔린 숨어 있던 역사가 비밀스럽게 고개를 드는 순간,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발자취는 어떻게 새겨지고 있느냐고 역사가 묻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를 보는 일은 현재 자신을 보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 속의 인물들, 그들도 언젠가 이 땅에 우리처럼 살았던 사람들이므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언젠간 이 땅에 역사로 남을 것이므로.

지금으로부터 160여년 전,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선교사 다블뤼 주교가 한참 천주교 박해가 진행되고 있던 조선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합덕읍의 신리에 숨어들어 손자선 씨의 집에서 비밀스럽게 선교활동을 펼쳤다. 조선의 제 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는 신리에서 성사를 집전하고 신앙을 가르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수한 천주교 신자들을 죽음으로 내몬 병인박해가 기승을 부리던 1886년의 봄, 3월 30일에 다블뤼 주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순교하기에 이른다. 이때, 다블뤼 주교를 따르던 손자선 씨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신리지역의 많은 천주교인들이 함께 산화했다. 그들이 순교한 이유는 극명하게 간단했다. 신앙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믿었던 절대자를 부정했다면 그들은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죽음을 선택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많은 신자들이 목이 잘린 채 땅에 묻혔다. 그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믿었으므로, 그 믿음으로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카타콤바, 신리성지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신리성지는 성지로서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한 채 거의 내버려두다시피 방치됐다. 전통적으로 천주교신자들이 많은 신리 지역의 신자들이 그나마 미사를 올릴 수 있도록 다블뤼 주교가 살았던 주교관이 강당 형태로 개조되어 작은 공소로 사용됐을 뿐이었다. 조선천주교의 요람이며, 한국천주교회의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와 신자, 순교자가 배출된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곳인 신리성지의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에 비하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카타콤바’란 로마시대에 천주교의 박해를 피해 초기교회 신자들이 예배소와 피신처, 그리고 동료 신자들의 시신을 묻었던 장지(葬地) 등으로 사용했던 로마 인근의 지하통로를 일컫는 말로, 흔히 신리성지를 ‘조선의 카타콤바’라고 일컫는다. 조선천주교의 역사상 가장 성지로서 빛을 발해야 할 신리성지가 비로소 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2003년의 일이었다. 그 동안 많이 훼손됐던 다블뤼 주교관의 원형 복원을 위한 실측조사가 이뤄졌고, 2003년 11월30일 다블뤼 주교관이 옛집 그대로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복원된 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며,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또한 2004년 4월26일엔 신리성지 신축성당 기공식이 열렸고, 2년여 동안의 공사를 거쳐 지난 5월6일 ‘성 다블뤼 안토니오·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의 완공을 축하하고 이를 봉헌하는 축복미사가 열렸다. 다블뤼 주교와 그를 따르던 손자선 성인의 가족들, 그리고 신리성지의 숱한 신자들이 순교한 지 140년만의 일이었다.

순교자의 묘들

1972년엔 신리성지 인근의 손자선 씨 집안의 선산이었던 야산에서 32기의 목이 없는 순교자의 묘가 발굴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박해의 칼날이 날카로웠을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죽인 후 목은 수효를 확인하기 위해 가져가고 시신만을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1985년엔 같은 지역에서 14기의 손씨 가족 순교자 묘가 추가로 발굴되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발굴 지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합덕읍 대전리의 공동묘지에 이장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 묘들이 발굴될 당시에 묵주와 십자가 등의 오래된 성물들이 ‘됫박으로 한 됫박’ 가득할 만큼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순교자의 묘들이 늦게나마 발굴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행스러운 일임과 동시에 너무 늦게 발굴되었기 때문에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순교자의 묘들 중 일부는 아직도 연고 없는 버려진 무덤처럼 방치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해인 수녀는 ‘신리성지에서’라는 헌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이름 없이 잊혀지며 죽어간 순교자들께 우리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힙니다 / 그 한결같은 신앙의 삶 닮지 못한 부끄러움 / 이토록 아름답고 유서 깊은 성지를 더 소중하게 가꾸고 지키지 못한 부끄러움....../ 우리는 이렇게 자유 속에 편히 살고 있습니다 / 그 은혜 충분히 감사하지 못하고 건성으로 살아온 날들 용서하여 주십시오......」

영혼과 육체의 쉼터로

신리성지는 현재 1차 조경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이 끝나면 2차 조경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신리성지의 김성태 신부는 신리성지를 유서 깊은 성지로서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가톨릭의 역사를 이해하고 순교의 신앙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성 다블뤼 안토니오·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내부에 전시관을 마련해 신리성지의 역사와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고, 주변에 자연친화적 휴식공간을 마련해 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이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정화하는 휴식처와 쉼터로서의 모습을 차츰 갖춰나갈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