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같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88년의 일입니다. 결혼 주례를 맡아주신 리영희 당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분께서는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살 거냐”고 물으셨었습니다.
저는 “고향에 돌아가 지역운동을 하다 신문을 만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 어릴 적 추억이 아스라이 남아있는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89년부터 ‘읍내리 카페’를 운영하면서 단골손님들과 함께 월간으로 ‘읍내리 소식’을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회를 거듭하면서 편집위원회가 구성되고 ‘읍내리 소식’은 당진의 첫 시민운동 단체였던 당진사랑시민모임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당진사랑을 통해 청년·문화·시민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고 월간 ‘당진사랑’도 발간했습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 워드프로세서로 매월 소식지를 편집하고 발간하는 일은 여럿이 며칠 밤을 새워야 할 정도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진사랑시민모임이 성장하면서 지역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구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중심의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우려, 다시 부활한 지방자치를 어떻게 정착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 개발 속에 주민들의 삶이 개별화되고 황폐화돼 가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 시민운동만으로는 전망을 세우기 어렵다는 인식을 공유해 나갔습니다.
그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93년 11월, 행정과 지방의회를 비판 견제하고 주민들의 삶을 전하면서 지방자치 발전과 미래지향적인 지역공동체 형성을 창간이념으로 내걸고 ‘당진시대’를 창간했습니다.
수십명의 소액주주와 5명의 직원으로 10평의 사무실에서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열정과 사명감은 희망찬 미래를 예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직원복지도 열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결혼한 직원은 직책에 관계없이 40만원, 미혼은 20만원을 받고 보험가입은 꿈도 꾸지 못했지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밤 12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일요일에도 전 직원이 나와 신문분류작업과 신문 배달업무로 신문사가 삶의 전부가 되어버렸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선거를 여러 차례 치렀고 중부권특정폐기물 반대운동, 유공입주 반대운동, 행담도 개발, 김현욱·송영진씨 구속, 당진 전역을 휩쓸었던 홍수 등 크고 작은 소식들이 ‘당진시대’를 통해 군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언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전임직원의 노력이 13년 간 한결같았다는 자부심은 당진시대 임직원만이 느낄 수 있는 자부심인지도 모릅니다.
‘당진시대’는 영세한 자본으로 외부의 도움을 한번도 받지 못하고 지역신문사를 경영해왔습니다.
그렇게 이어져 오면서 지난 2004년 전환기가 마련됐습니다. 건강한 지역신문을 육성하기 위해 지역신문발전지원법이 제정된 것입니다. 물론 저는 바른지역언론연대 회장 자격으로 그 법을 처음 제안하고 국회입법과 정부예산 배정(240억) 추진 과정에 깊숙이 관여했습니다.
지역신문지원법에 의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4대 보험, 세금 납부실적, 부채비율, 영업이익률, 매출액 증감율, 편집규약, 편집위원회 운영실적, 주식보유현황 등 편집권 독립을 위한 제도적 장치, 경영의 건전성 등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제시하는 기준에 의한 다양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당진시대’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평가에서 전국의 지역신문 가운데 1위를 차지한 것은 신문을 제작하면서 느꼈던 가장 보람 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진시대’가 지역언론으로서 기초를 잘 다졌다면 이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시기일 것입니다.
1만부 독자, 20면 증면, 문화센터 운영을 통한 지역환원사업 등 당면한 현안 사업과 일간지로의 전환, 인근지역으로의 진출 등 장기적인 프로그램도 고민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결국 이런 짐들은 후배의 몫으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떠나는 마음은 무겁지만 훌륭한 후배들이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저와 당진시대에 보내주셨던 분에 넘치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