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때 그 시절 혹은 역사속의 오늘을 더듬어 보면서 향수에 젖기도 하고, 과거의 역사를 오늘의 현실 속에 조명해보며 역사를 배우기도 한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역사없는 인류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의 국가, 민족, 사회와 문화는 모두 지난 역사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영원이라는 시간 개념 안에서 그때와 지금은 다를 바 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성서 속의 시인은 천 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 년 같다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사회의 불행은 서로가 어느 한 쪽만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흑백분규 속에 우리의 귀중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근동지방이나 남미 혹은 아시아 등의 수 천년된 고대문화를 접하다보면 불가사의한 문화의 흔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찬란한 모습과는 달리 지금은 더 이상의 발전도 없이 옛문화의 흔적이나 자랑하며 그것에 기대고 있는 나라들을 볼 수 있다. 이는 한때의 찬란한 역사에만 집착하여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사회질서를 추구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고 변화하는 역사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다.
그때와 지금 그리고 보수와 진보라는 명제는 정치 싸움의 틀에서 밖에 볼 줄 모르는 시행착오를 만들어서는 안된다. 역지사지라 했던가. 우리는 서로 상대편의 입장에서 볼 줄 아는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한 쪽만이 옳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국가 설립자 다윗은 왕이 된 후 훌륭한 정치력과 외교적 수완을 발하여 정적에 대해서는 관대함을, 백성들에게는 정의와 공의를 행했다.
무엇보다 다윗의 통치력의 위대함은 보수 세력을 껴안은 정치력이라 볼 수 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은 신흥세력이자 진보와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보수 세력이 아끼던 법궤의 옛 상징을 회복시키고 남쪽지파와 북쪽지파간의 감정이 상하지 않는 중간지점인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였다.
이는 양쪽 모두를 행길 수 있는 정치적 이점을 확보하면서도 양쪽 모두를 인정한 셈이다. 새로운 질서 추구만이 아니라 보수 세력을 껴안은 다윗의 행보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한 통일왕국을 이루어낸 것이다.
전설상의 새라고 부르는 비익조가 있다. 암컷과 수컷은 눈과 날개가 하나씩밖에 없어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하고 멀리 보지를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개를 가지런히 맞대고 날아다닐 수 밖에 없는 이 새를 남녀의 지극한 정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라는 두 날개는 비익조처럼 가지런히 날 수 없을까?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은 이야기인가? 그러나 다윗은 진보와 보수를 모두 소중히 여겼고 두 세력을 모두 껴안고 통일왕조를 만들어냈다. 보수는 진보세력이 추구하는 변화와 새질서를 인정해야 한다.
또한 진보는 보수의 경험과 지혜를 껴안아야 한다. 고대의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라고 했다. 해 아래서 영원한 보수도 진보도 없다. 진보와 보수의 두 날개로 높이 비뱅하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