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군내 봉기들은 동학이 원 뿌리여”

동학군 의병장 림정규의 고장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만난 전 재 철 어르신

“난, 천도교인두 아니구 암껏두 아녀. 허지만 그렇게 듣구 자랐고, 이끔도 그렇게 알고 있어. 기미년에 대호지서 4.4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텀 천도교가 거군적으루다 거사를 준비허구 있었다구. 대호지서 먼저 터지는 바람에 거사는 실패루 돌아갔지먼서두. 그해 당진군 여기저기서 소소하게 일어난 게 모두 천도교 줄기여.”

대호지면 송전리 전재철(82세) 어르신은 주장한다.

지난 94년 좥동학 100년좦을 계기로 동학의 ‘구세구민(求世求民)’ 사상은 민족 구원적 성격과 사회혁명적 성격을 모두 가진 민족운동임이 다시 확인되었다. 일제와 관군의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1906년, 교주 손병희가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동학은 산불처럼 식민지 민중들의 가슴 가슴을 타고 옮겨 붙으며 기회있을 때마다 큰불이 되곤 했다.

1919년 대호지 4.4운동의 미해결인 부분, 천도교·동학과의 관련을 푸는 일말의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동학의병장 림정규의 고장이기도 한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전재철 어르신을 만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분의 주장은 4.4운동 당시, 군내의 천도교 세력들이 거군적인 거사를 준비하다가 대호지에서 유림들 중심으로 촉발되자 일부 천도교 세력은 그쪽으로 합류가 되었고, 일부는 면단위 소규모 시위로 산발적으로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거군적인 거사가 실패한 이유는 4.4운동으로 일경의 탄압과 감시가 극에 달했고, 천도교 당진교구의 중심인물인 백남덕이 대호지 4.4운동에 깊이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천도교도였든 송전리 사람 백남덕이, 그 생질인 홍순국이, 김장안이 같은 사람들이 당진읍내에서 대대적으로 거사를 허기로 하고 1, 2월에 모금도 허고 있었지. 그런데 송전리 사람이면서 대호지면사무소 직원이었든 민재봉이가 와서 면장중심으루다 만세운동이 준비되고 있으니 동참해달라고 해서 생각끝에 협조허기로 한거여. 그렇게 천도교를 통해서 우리동네도 많이 흡수가 된겨.”

적어도 송전리에서 대호지 4.4운동에 참가하게 된 것은 백남덕과 천도교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확실히 당시에 천도교 당진교구는 당진읍 대덕리에 있었다. 또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자료에 따르면 백남덕은 당시 1917년부터 당진교구의 공선원(교화교육담당 간부장)으로 임명돼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대호지·정미가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서산이었지만 천도교에서는 당진교구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다.

백남덕을 중심으로 당진읍에서 큰 거사를 하려고 했다는 전재철 어르신의 주장은 이러한 당시 정황으로 볼때 상당히 근거있어 보인다.

“대호지 4.4운동 당시에도 거군적인 거사가 준비중이었어”

4.4운동의 뿌리와 정신은? 순성·송악·합덕 시위의 진상은?

뿐만 아니라 대호지 4.4운동을 주동한 적지않은 인물들이 동학운동가 또는 동학사상가라는 사실이 더욱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해 발간된 당진군지에서는 대호지 4.4운동의 천도교 관련설을 한쪽 분량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대호지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중 남상락·이대하가 동학사상가였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루어졌다. 또 ‘천도교가 주민동원에 편승한 정도가 아니라 당시 만세운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좥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사(1991, 박상건)좦에서 부분 부분 언급되면서도 기금모금단체 정도로 다룬 것에 비하면 훨씬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렇다면 왜 4.4운동에 천도교 관련사실이 이토록 애매한 것일까.

“백남덕이 실제루 중요헌 인물이었는디다 기미년 거사 당일날 선친의 임종이 다급허다는 급보를 듣구 천의까지 갔다가 되돌아왔기 때문이여.”

전 어르신께서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탁’ 치신다.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사건의 절묘한 교차. 때문에 백남덕·남주 형제는 집으로 돌아와 유혈사태를 면했고 감옥에도 가지 않았다. 재판기록도 없다. 아울러 한동안은 역사에서도 잊혀졌다. 이에 대해 어르신은 이렇게 항변한다.

“아니, 비겁하게 피한 것두 아니구 감옥 안가믄 애국자도 아녀?”

당진군지에서는 쓰고 있다. 좥4일 뒤인 4월8일, 송전리에서는 제2의 만세운동이 일어나 이곳에서 만세운동 시작논의가 매우 강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좦고.

또 주체세력이 확인되지 않은 만세운동들이 4월4일 전후해 정미, 순성, 당진, 송악, 합덕 등지에서 일어났다. 좥밤이면 횃불을 들고 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산에서 만세소리가 터지면 벽지의 서민들도 산으로 뛰어오르며 봉화를 밝히고 독립만세를 불렀다(당진지역 항일독립운동사, 박상건, 196쪽).좦

전재철 어르신의 주장은 이 모든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이 천도교, 즉 동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 글쎄, 첫번 대호지운동사 편찬 땐 백남덕이, 홍순국이를 싹 뺐더라구. 그리고 비석을 봐도 그려. 이럴 수가 있느냐 말여. 그 양반이 워뜬 양반인디. 김교남 면장 때, 몇사람이 따져서 비석 맨 꼬래비에 간신히 새겨넣었어. 원.”

1970년대의 얘기다. 알 수 없다. 거사현장에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 수형자 명부에 있는 것과 없는 것, 그것만이 역사에 남거나 사라지는 기준이 되는지.

분명한 것은 당시 일제의 탄압과 고문이 대단했다는 것, 그것을 견딘 것만으로도 존경받고 위로받을 만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고문은 불달군 인두로 지지기,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먹이기, 사지 뒤틀기, 전기고문, 남자 생식기에 탄소막대를 넣고 불당기기(일명 흑두고문) 등 죽음보다 더한 것들이었다. 이때 고문으로 이달준(송전리)·박경옥(사성리)·김도일(마중리)이 옥중사망했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해 보이는 것이 있다. 백남덕이 거사현장에 없었다 하더라도, 또 4.4운동을 촉발하고, 주동한 세력은 아니라 할지라도 참가한 다수 군중과 군중의 정신을 이룬 것은 유학이라기 보다 ‘동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구 봐. 한쪽은 중앙에 연결된 천도교구, 한쪽은 서울로 연락된 남씨들 쪽이구.”

일리있는 전 어르신의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인지 모른다. 갈라져 있었다기 보다 당시에는 이 두세력이 합쳐져 있었을 것이다. 대호지 4.4운동은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도세력과 동학에 기초한 민중의 힘·사상이 어우러진 합작품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동학에 관련된 부분을 역사 위에 올려놓고 더 많은 연구와 검증을 하는 일은 향토역사계의 여전한 숙제다.

대호지면 송전리에는 아직도 윷놀이 할 때 막동치기 하다가 막가는 말이, 다 가서 몰살하면 좥치명이네 망하듯 한다좦고 소리치는 관습이 있다. 송전리 사람이면서 동학에 입교한 후 의병장 활동을 했던 림정규(일명 치명). 그는 왜경에 붙잡혀 이곳 송전리 고지내 냇가를 온통 붉은 피로 물들이며 거세당해 학살되었다(1909년). 1919년 대호지에서 4.4만세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10년전의 일이었다. 당시 송전리 인근 사람이면 누구나 이 일에 몸서리 친 기억을 버리지 못했다.

김태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