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경력 42년에 남몰래 이발봉사 30년

“사람이 사람 돕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소리없이 소문없이 사는 60 초로의 이발사

무궁화이발소 박기택씨

“처음 이 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열여덟이고 지금 내 나이 예순이니까 벌써 42년이 흘렀네요.”

처음 인터뷰를 청하느라 전화를 걸었을 때 “머리 감기느라 바쁘다”고 깐깐하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리던 이발사 아저씨 박기택씨는 막상 찾아가 보니 소박한 초로의 어른이었다.

얼마 전 신문사에는 익명의 제보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30년 넘게 소리 소문없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이발봉사를 하고있는 이발사 한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당진군민회관 왼편에 있는 무궁화 이발소. 나라꽃을 상호로 해서 간판을 내건 것만 보아도 주인의 성품을 알 만했다. 고지식하고 자기분수 너머의 것에 곁눈질 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었다.

이발소에는 방금 이발을 끝낸 한 노인고객이 주인 이발사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 고객은 멀리 송산에서 온 최병두(71세) 할아버지였다. 머리에 하얗게 덮인 백발을 소담스러운 잔디처럼 스포츠 머리로 다듬은 뒤였다.

“하, 글쎄 이 양반이 어찌나 머리를 잘 다듬는지 집에 가서 거울을 보면 보기 싫게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거짓말 안보태서 딴 집에서 깎을 때보다 한 5일은 더 가는 것 같습디다.”

그래서 최할아버지는 벌써 10년째 이발을 하기 위해 송산에서 버스를 타고 오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물론 가끔 딴 이발소를 가는 일도 있지요. 그럴 때는 어떤 때냐? 바빠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죠. 글쎄 이 양반이 머리 깎는 솜씨도 솜씨지만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얼른 대충 깎는 법이 없어요. 깎는 사람이야 좋지만 기다리기가 영 수월치 않죠.”

옆에 앉아있던 친구 한분은 ‘굼뱅이’라고 박씨 아저씨를 놀린다. 그러나 결코 악의로 던진 말이 아니다. 프로라고 해서 서두르거나 손님을 많이 받으려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소홀히 하거나 하지 않는 친구에 대한 자랑이다. 그래서 군수님처럼 머리손질이 까다로운 고객도 변치않고 이 이발소를 고집하는 것이다.

주인이발사와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끊일 만하면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설 명절을 지낸 뒤라 머리를 깎으려는 사람들은 없고 문안차 들른 주인의 친구 되는 사람들이었다.

네평 남짓하다는 이발소가 꽉 차고 일회용 커피믹스를 타 마셔가며 어느 결에 이야기판이 벌어져 버렸다. 굳이 인터뷰가 필요없게 된 것이다. 그저 이 만남을 위해 마련된 듯한 좌중에서 같이 웃어가며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되었다. 고지식하고 다소는 무심해 보이기도 하는 주인아저씨와 단둘이 있었더라면 미처 듣지 못했을 이야기들도 오갔다. 듣고 보니 선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무심해 보이는 표정은 삶의 수심이 남긴 자국 같았다. 그러나 찌푸리거나 옹색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복이었다.

정말로 배가 고파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일을 찾아 나섰던 열여덟부터 남의 머리 깎기를 업으로 삼고 살아온 42년. 처음엔 보조 이발사였고 지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를 매만지는 프로라는 차이 말고, 그때나 지금이나 비좁고 소박한 곳에서 제 손으로 직접 일을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면도사나 보조사도 하나 두지 않았다. 주인 박씨 아저씨가 이발소를 비우는 것은 자신의 머리를 깎기 위해 다른 이발소를 찾아갈 때(주인 박씨 아저씨는 이것을 ‘품앗이’라고 불렀다)와 긴한 볼일이 있을 때이다.

그 ‘긴한 볼일’이라는 것이 박씨 아저씨에게는 딱 한가지 있다.

그 일이 시작된 것은 19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에서 제대하고 당진읍내에 조그마한 이발소를 차린 박씨 아저씨는 동네에 형편이 어려운 어른 한 분이 중풍으로 누워계시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머리 자르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한 박씨는 간간이 그분을 방문해 머리를 잘라드리기로 했다. 그일은 그날 이후로 16년간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박씨 아저씨에게는 이런 류의 정보가 속속 입수되었다. 아니, 한 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고 보니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을 지 모르는 딱한 노인들의 사정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박씨 아저씨는 그 뒤로 30년이 넘게 매년 열분이 넘는 노인들을 위해 이발봉사를 다니고 있다. 그 사이 여러분이 돌아가시고 그러면 다시 봉사할 분이 생기곤 했다.

주로 일요일에 시간을 내는 편이었지만 자가용도 없는 처지에 하루에 여러집을 돌 수도 없는 일이어서 평일에 손님이 없는 짬을 내어 문을 닫고는 택시를 타고 휭하니 다녀오곤 했다. 살다보면 자신과 가족을 돌보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에 단체도 아닌 혼자 노력으로 시간과 공을 들여 남을 돌본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었겠는가.

친구분들이 박씨 아저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박씨 아저씨의 부인은 오랫동안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몸과 마음이 약해져서 지금은 부인을 보살피고 가사를 돌보는 일도 박씨 아저씨의 몫이 되었다. 저녁 8시에 이발소 문을 닫으면 아저씨는 어김없이 시장에 들러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간다. 고생한 부인을 쉬게 하려고 이발소의 빨래거리와 집안 빨래도 손수 하고, 급한 날에는 달빛을 받으며 밭일을 한다. 얼마 전에는 주말이 오기 전에 콩을 거둬야겠기에 남들 자는 한밤중에 콩을 따고 콩타작을 하다가 혹시나 도둑이 들었나 놀란 이웃들이 깨어나 달려나온 일도 있었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취재하다니 말도 안돼요. 남에게 알리자고 한 일도 아니고 알리고 싶지도 않은데... 남부끄럽습니다.”

완강히 인터뷰를 사양하면서도 아저씨는 그럴 듯하지는 않지만 성실하고 고지식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는 않다. 다만 내세우는 게 싫을 뿐이다.

내일도 박씨 아저씨는 새벽 냉수욕을 하며 추위를 이기고 아침상을 차린 뒤 동이 틀 무렵인 7시 30분이 되기 전에 이발소의 문을 열 것이다. 여름에도 6시를 넘기지 않는다. 이렇게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나이 예순을 맞은 아저씨는 적어도 팔순까지는 이 일에서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

김태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