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님의 임종을 앞두고 당진에 머물렀다. 숨가쁜 일상에 머리라도 식힐까 남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흩어진 일상을 모으기라도 하듯 나선형의 산길을 따라 걸었다. 산꼭대기에 상록탑이 세워져 있었다. 농촌계몽소설가 심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이다. 그곳에는 심훈의 시가 나라는 빼앗긴 한과 함께 새겨져 있다.

그날의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으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 하늘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심훈의 <그날이 오면> 중에서

학창 시절에 읽었던 ‘상록수’는 기억이 너무 선명하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우리 교과서에도 실렸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바 있는 애국시인이었고 망명생활을 하고 돌아왔지만 집필생활 또한 평탄하지 못했고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그의 시 왼쪽 끝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상록탑 건립 추진위원회’라는 글귀에 내 눈이 머물렀다.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건립을 추진하셨던 분들 중의 한 분이었다. 아버지께서 어느 날 서울을 다녀오셨다. 국회의원과 당진 출신의 지인들을 만나 상록탑 건립 후원금을 기부받기 위해서였다. 심훈 씨의 형의 아들인 심재영 씨는 지금의 서울농대인 수원농대를 나오셨고 심훈의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에 살고 있었다. 필경사는 우리집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한의사이신 우리 아버지의 ‘인제한약방’으로 “윤 원장 계슈?”하며 모자가 멋스러운 양복차림으로 아침이면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한약방 툇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가기도 하고 한약방에 들어와 약짓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기다렸다 저녁이면 집앞 골목 어귀에 있는 막걸리 집에서 술 한 잔을 하곤 했고 그저 단지 심심해서 오시는 줄 알았더니 그런 좋은 일을 의논하고 계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당진읍내 상록탑 건립식에 다녀오시며 기념책을 출간했다며 수첩만한 조그만 책 ‘상록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 심훈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술을 무척 좋아하셨지. 장날이면 우리집앞 방앗간 앞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방아찧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돌아가곤 했지”

그 무렵 아버지께서는 한국문학전집 100권을 들여 놓으셨다.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집에 와 있었고 그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밤, 낮 읽어 오래지 않아 그 책을 다 읽었다. 내가 낳고 자란 송악면 중흥리에 상록중학교가 있었다. 상록수 정신을 이어받아 젊은 청년들이 교육의 열을 불태운 학교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중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고등학교 때 문학소녀였던 언니는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한 남자의 시에 반해 결혼했고 유난히 한이 많은 가문의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었다.

상록탑을 세운 지 40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20년만에 이제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 생각에 불현듯 필경사로 발길을 돌렸다. 방명록에 나의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께서 말없이 보여주신 행동에서 문학이라는 숲을 보았고 이제 그 숲속에 나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