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21(1797)년 6월 27일 조선의 군왕 정조는 성정각에서 집무를 본다. 승지 이해우, 홍희영, 이계원 등으로 부터 내각에서 올라온 보고 사항을 듣고 곧바로 이날 임지로 내려갈 군수 현감 등이 입대를 한다. 첫번째로 정조앞에 다가와 부복한 사람이 박지원이다. 박지원이 이름은 지원이고 성은 박가라 말하자 정조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령 경력이 있냐 묻는다. 박지원은 안의현감을 지냈다 답을 한다. 정조는 다시 나이를 묻는다. 박지원은 61세라 말한다. 정조는 자신보다 14살이 더 많은 박지원을 응시하며 다시 묻는다.
“듣자니 글을 잘 짓는다 들었다. 마침 일거리가 하나 있다. 제주 표류민 이방익을 아느냐”
이방익은 제주도 어민으로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강남지방까지 표류하다 수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대략 들어 아나이다.”
“글로 정리를 하라. 면천은 작은 고을이기는 하나 다스림에 소홀하면 안될 것이다.”
박지원은 “명을 받들겠나이다”하고 하직인사를 한 뒤 면천으로 향한다. 이 기록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으로 조선시대 군왕과 군수의 하직인사 대면 기록으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다. 이로부터 박지원은 면천으로 내려가 37개월 군수직을 수행하게 된다. 박지원은 양유리 저수지 축조, 골정제 보수, 군선제조및 수군훈련 등에 힘을 쏟는 한편 지역 천주교인들을 회유 설득한다. 그리고 이방익의 일 등 수권의 주목받는 저작물을 면천에서 완성한다.
그러나 박지원의 면천군수 치적에 합덕방죽 대보수 사건이 누락되어 있다. 조선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합덕방죽을 대규모로 보수한 기록이 여러건 있다. 영조 22년(김이호) 영조38년(김양택) 영조 44년(홍양호) 정조 2년 등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들중 영조 44년의 기록은 만여명의 도민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이 기록들은 당진 향토지 등에도 포착된 것이다.
정조 23년 승정원일기에 기록 하나가 더 있다. 충청관찰사 이태영 홍주목사 김이제 면천군수 박지원등이 충청 우도민 1만2천명을 동원 합덕 방죽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기록이다. 조선의 조세제도는 조용조(調庸租)였다. 조선의 평민은 1년에 30일간 국가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이 법에 따라 충청 우도에서만 1만2천명의 장정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 기록이 기록의 마니아인 박지원의 기록물 속에 없다는 것이다.
합덕방죽은 조선의 국가 중요시설물이었다. 당진현감과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김홍욱(당진 문화원앞에 그의 비가 있음)이 합덕방죽 아래 수백석의 수전(水田)을 개간하는 등 충청도 의 관리들의 중요 토목사업의 하나가 합덕방죽이곤 했다.
하여 방죽의 관리인으로 유언호 이정규등 전직 관료들에게 맡겨졌고 이들의 관리가 지방관료들과 척을 질 정도로 수자원관리는 강고 했다. 이정규는 방죽 관리를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다 합덕방죽 인근 주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민란을 야기하는 계기도 될 정도였다.
박지원의 기록은 계속 발굴되고 있다. 박지원은 면천군수로 부임해 온 첫날을 성문밖 어떤 집에서 유숙하며 면천성의 성문을 닫는 의식을 보고 기록할 정도로 정치한 글쟁이다. 이런 박지원의 글쓰기 특징으로 볼 때 합덕방죽 건설현장의 생생한 기록이 살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