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라는 소설에서 악마는 이반의 두 형을 군대와 재물로 유혹하여 파멸로 이끈다. 그러나 우직하게 농사만 짓는 이반은 어떤 유혹으로도 흔들 수 없었다. 결국 악마는 부질없이 머리 쓰면 잘산다고 외치다가 지옥으로 사라진다.
이 소설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그 행복은 권력이나 부유함 혹은 지식이 아니라 건강한 노동과 소박한 삶에 있다는 것이다. 즉 물질만능주의는 지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에로 가려면 물질만능주의를 배격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 결론은 요즘을 사는 우리들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기도 하다.
민수기 21장 4-9절에서도 이러한 교훈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돔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에돔 왕은 ‘왕의 길’만을 지나가겠다는 모세의 청을 거절하고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려했다. 할 수 없이 이스라엘은 멀고 험한 길로 돌아가야 했다. 이에 쉬운 길을 놓고 험한 길을 가게 된 이스라엘은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
그 때 하나님은 원망하는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놀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고백했고,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에 하나님은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장대 위의 놋뱀을 보면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났다.
전통적으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돼, 십자가를 바라보면 산다는 메시지로 전해졌다. 그러나 놋뱀이 예수님일 수는 없다. 이런 해석은 구조상의 유사함에 기인한 오해일 뿐이다. 본문을 이해하려면, 놋뱀에 대해 알아야 한다.
뱀은 고대 근동지방에서 권능,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숭배됐다. 뱀 숭배 사상은 가나안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뱀에게 물려 죽어가면서도, 뱀신에게 잘 보이면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치료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뱀은 경배해야 할 신이었던 것이다.
400여 년 간 이집트 문화에 길들여진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나와 광야를 지나면서 고통의 순간이 왔을 때 이집트를 생각했다. 비록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뱀을 비롯한 수많은 신들이 보호해주는 안전한 이집트를 떠올렸다. ‘우리가 이집트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생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데 그렇게도 믿고 의지했던 이집트의 대표적인 뱀신이 그들을 물어 죽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뱀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 뱀을 신으로 격상시켰다는 데 있다.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아 사형시키고 그것을 모든 백성들이 보도록 높이 쳐들라고 하신 것은 놋뱀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물질만능주의의 허상 속에서 돈에 눌리고 권력에 눌려 허덕이는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의 길을 알려준다. 즉 물질만능주의를 장대에 매달아 사형시키는 것이다. 그 때 참된 생명의 길, 행복의 길이 열린다. 사람이 천하보다도 귀하게 존중받고 사랑받는 행복한 세상, 살맛나는 세상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