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같이 살고 있는 일곱 살, 다섯 살의 두 손녀가 있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듯 나 역시 두 손녀와 함께 살면서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일곱 살 손녀 소현이의 이야기

어느날 소현이는 “내일 엄마의 생일에 주려고 한다”며 가위를 달라고 하더니, 부산을 떨고 있었습니다. 궁금해 잠시 후 가본 곳에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생신을 축하해요. 소현이가”라는 글씨를 오려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7개의 상징적인 그림을 정성스럽게 그려 놓았습니다. 내가 놀란 것은 소현이가 ‘생일’이라는 말 대신 ‘생신’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겨우 일곱 살인 소현이가 어른에게 쓰는 존칭어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현이 엄마의 생일 다음날 아침, 같이 밥을 먹으면서 손녀에게 물었습니다.

“소현아, 너 엄마에게 준다는 생일축하카드 주었니?”

“예 주었는데, 엄마가 눈을 만지면서 ‘고맙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했어요”

나는 돈 만 원을 소현이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소현이는 할아버지보다 낫다. 할아버지는 엄마 생일도 몰랐는데….”

나는 처음으로 며느리에게 돈 5만 원을 주며 “오늘 시내에 가서 맛있는 점심을 사먹고 오라”고 했습니다.

다섯 살 손녀 소정이의 이야기

나는 손녀를 위해 앞마당에 그네를 매주었습니다. 어느 날 소정이는 할아버지 방 문 앞에 와서 “할아버지, 문 열어주세요. 그네 좀 밀어주실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주실 수 없어요?”라는 말은 명령어가 아닌 타협형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의 꼬마에게서 나온 이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만약 소정이가 “밀어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나를 졸랐다면 귀찮아서 들어주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밀어 주실 수 없나요?”라는 이 말 때문에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후 집에서나, 밖에 나가서나 누구에게든지 청탁할 일이 있으면 잊지 않고 “하여 주십시오” 대신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해 보니 부탁하기가 한결 부드럽고 상대방도 기꺼워하며 쉽게 요청을 받아주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작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에는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당시에는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했는데 지금은 두 손녀를 통해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순수한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깨달음을 줍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이자 곧 스승입니다.

나는 성모 마리아와 같은 두 손녀를 위해 이 세상에서 전쟁이 없기를 매일 하느님께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또한 세계의 모든 어른이 어린이가 될 때 전쟁은 결코 허용되지 않을 것을 굳게 믿습니다. 이 세상에 천국(극락)이 있다면 나의 두 손녀와 함께 할 때이며, 그 다음은 모든 어린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불변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