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읍 신리 이진규씨

성실한 연구로 스스로 농사해법 찾아

“내농사의 비결, 이 일지에 있죠”

‘쌀농사에 왕도 없다’ 33년 꼬박 영농일지 기록

투철한 직업정신, 90년 석탑산업훈장 받아

농촌지도자회 전국 부회장 거쳐 당진쌀연구회장에

쌀농사에 왕도(王道)는 없다고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 그에 따라 재배기술이 향상

된다해도 벼의 품종과 물과 일조량이라는 자연조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게 쌀농사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쌀농사를 보수적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농사결과를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품

종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어진 조건을 어떻게 개선하느냐에 따라 결과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도 있다. 바로 토질이다. 이렇게 조건을 불변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적극적으

로 생각해보면 뭔가 개선의 여지를 찾을 수 있다. 요즘 흔히 말하는 시각전환, 신사고란 이

런 것이 아닐까.

합덕읍 신리 이진규(63세)씨는 이미 30년전에 이 ‘신사고적 태도’로 쌀농사를 짓기 시작

한 사람이다. 현재 2만5천5백평의 농지를 경작하는 대농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

다. 오히려 이씨가 처음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 때에는 ‘중농’정도의 규모에 그나마

가세가 한참 기울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새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그는 월급쟁이 생활

을 해서는 부모님과 가족, 동생들까지 책임질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기울은 가세를 일으

켜 세우기 위한 ‘큰 사업’으로 농사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흔히 농사를 ‘특별한 노력이나 창의성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는 대학을 그것도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쌀농사에 뛰어든 일 자체가 별스럽게 여겨졌

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에겐 그러한 편견이 없었으며 제대로 해본다면 분명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이진규씨는 10년 목표로 농사에 매진하기로 하고 그때 가서 실패하면 그만둘 작정을 했다.

적어도 10년간 모든 것을 바쳐도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당초 가망이 없는 일

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진규씨는 8년째 되던 해 빚을 갚을 수 있었고 농토도 2만평으로 늘릴 수 있었다. 어느새

대농이 된 것이고 성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그것은 1964년 4월 24일 군대를 제대하고 그가 처음 논을 밟던 날부터 지금까지 33년간 빠

짐없이 써온 영농일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벌써 누렇게 변한 첫권부터 열다섯권이나 되는

일지에는 낱장마다 깨알같은 글씨로 매일매일 작업에 들어간 원가와 기타 가계지출, 소소한

주변변화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일지는 당진쌀 농사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훌륭한

사료로도 쓰이고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가 일지를 이처럼 충실히 썼다는 사실은 주체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는 징표로 보인다. 원가개념에 입각한 경영형 농사라는 게 따로 있을까. 이 일지는 규모있고

짜임새있는 농사를 가능하게 해주었고 누군가 정해준 일반적인 공식으로 농사를 지은 게 아

니라 스스로 공식을 찾는 농사를 지었음을 말해준다.

이진규씨가 말하는 농사의 좋은 조건은 첫째가 품종, 둘째가 토양이다. 이씨는 다른 조건에

비해 그나마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이 두가지 조건의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다.

84년 경지정리를 할 때 토양검증결과 유기질 함량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더구나

흙을 파서 논둑을 쌓는 바람에 새흙이 돼버려 이씨는 이후 꼬박 10년간 논에 볏짚을 썰어

넣었다. 이것이 파급되어 요즘에는 대다수 농가에서 이 방법으로 농토를 배양하고 있다.

“합덕쌀의 성가가 괜히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농사에 대한 집념과 애착, 연구와 노력의

결과인 거죠. 저는 최근 합덕쌀이 도지사 품질인증을 받은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다. 농사에 대한 이씨의 투자는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여름 450만

원씩을 들여 건조기 두대를 들여놓고 주변시설을 고안하느라 자다가도 일어나기를 여러번

했다. 이씨가 고안해 만든 트렉터 탱크는 1천5백평에서 나오는 벼를 한꺼번에 쏟아부을 수

있다. 특히 콘크리트 방수벽 안에 다시 5mm 철판을 대어 장마가 오래가도 물이 스밀 염려

가 없다. 부인 유종금씨가 이제 좀 그만하자고 해도 이씨는 앞으로 저장탱크를 또 만들 생

각이다.

이씨의 사회활동경력과 수상경력도 화려한 편이다. 10년을 논과 싸운 그는 서서히 사회활

동을 시작해 농촌지도자회 면회장, 군회장, 도회장을 거쳐 올 2월까지 6년동안 중앙회 부회

장을 지냈다. 83년 장관상을 받고 농촌지도자회 도연합회장을 맡았던 90년에는 드물게 ‘석

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씨는 지난해 80kg들이 6백가마를 수확해 8천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렸다.

“요즘 찬바람나는 명예퇴직을 생각하면 농업은 꽤 괜찮은 직업입니다. 앞으로 한 80이 될

때까지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농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가 아직은 만족할 만하

지 못하기 때문이다. 2년전 자신의 주도로 만든 당진쌀연구회에서 올해 회장을 맡게 된 이

진규씨는 바로 이 농민의 사회적 지위향상에 다시 한번 애써 볼 작정이다.

이씨는 스스로 성공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뤄낸 것이기에 더욱 성공다와 보인다. 무엇보다 33년간 써내려온 그의 「농사일지」는

“창조는 성실이라는 토양에서 생산된다”는 격언이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