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하고 군사를 편성하였다. 진압군은 호위청, 통위영, 장위영, 총어영, 용호영, 경리청, 교도대, 진무영 등 서울과 강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경군의 각 병영을 진압작전에 동원하였다.

도순무사로 신정희를 임명하였고, 통위영 영관 이규태를 좌선봉장으로 삼았으며, 장위영 영관 및 죽산부사이던 이두황을 우선봉장에 임명하였다.

이밖에 장위영 영관 원세록, 경리청 영관 홍운섭, 경리청 영관 및 서산군사 성하영, 교도대 영관 이진호, 강화도 진무영 중군 황헌주 등과 2,501명의 경군이 동학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었다. 이렇게 편성된 진압부대인 도순무영의 군사 지휘권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일본군에게 넘겨졌다.

이에 따라 조선군 양호도순무영의 진압부대는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 미나미 고시로라는 소좌에게 지휘를 받는 꼴이 되었다. 오늘날 전시작전권을 외국군대에게 넘긴 것의 기원은 이렇듯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에게 군사지휘권을 내 준 것으로 비롯된 것이다.

일본군 역시 동학농민군을 토벌한다는 계획 아래 후비보병 19대대를 파견하였다. 미나미 고시로 소좌가 이끄는 후비보병 19대대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전담 부대였는데 공식 명칭이 ‘동비토멸부대’였다. 이는 일본이 동학농민군을 어떻게 진압할 계획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일본군은 후비보병 19대대를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의 3개 부대로 편성하고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의 순서대로 부대를 출동시켰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부대를 출동시켰던 것은 동학농민군을 호남의 서남쪽 땅 끝으로 몰아넣고 학살할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이 전투에서 패하여 백두대간을 타고 러시아 국경을 넘어 가게 되면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위협할 것으로 보고 이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성된 조선경군과 일본군 토멸부대는 동학농민군이 집결할 것으로 보이는 공주로 향했다.

이제 공주를 사이에 둔 동학농민군과 조선경군, 일본군 연합부대간의 대규모 전투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