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같은 17세에 간호원모집 신청했더니...
벌써 60년이 흘렀다. 열일곱, 꽃보다 더 고운 나이에 고향집을 떠나 다시는 그 집 문지방을 넘지 못한 것이. 가난은 했지만 넓디 넓은 이세상 당당하게 살아보겠다는 화통같은 꿈을 접어버린 것이 벌써 60년이다.
조선 식민지 역사의 치부인 정신대. 육체적인 상처와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사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대변자들. 그런 할머니를 TV에서 보기는 쉬웠지만 직접 만나기란 어려웠다. 눈물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당진군 송악면 오곡리에 사는 신경란(77세) 할머니는 충남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 7분중 한 사람이다. 아직도 억센 사투리가 남아있는 경북 고령군 출신이지만 당진에 올라와 산 지 벌써 46년째.
네살, 열두살에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여의고 오빠와 함께 어렵게 살던 소녀 신경란은 1937년 ‘간호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했다. 그러나 그녀가 일본인에 이끌려 간 곳은 좧일본군 큐우슈우 도코시다 6사단좩이 있는 추운 상해벌판. 그후 1년6개월 동안 그녀는 간호원이 아니라 이 부대의 뒤를 따라다니며 일본군을 위로하는 종군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다.
밤중에 토벌을 나갔다가 낮에 돌아오는 군사들은 난폭했으며 하루도 진지 한군데에 머물지 않고 부대를 이동했다. 상해에서 광주로, 가흥, 무창, 남경을 거쳐 양자강까지 진군했다 다시 남경으로 돌아왔다.
불행중 다행으로 일반사병반이 아니라 장교반에 배치되어 동물적인 강탈을 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뜻과 상관없는 치욕을 겪으며 신씨는 부끄러움에 죽고만 싶었다. 게다가 다른 지역에서 조선여성들이 하루 40~50명의 일본군을 상대하다 육신이 찢어지고, 강탈당하고, 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으며 괴로웠던 심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강인하고 사교적이며 똑똑하던 신씨는 자살하기로 마음먹고 폐병이라고 속여 일본군의 접근을 막으며 단식을 벌였다.
“그래도 그 먼데서 이런 꼴로 죽나 싶으니 억울하대. 집에 가고 싶었어. 살아서 한번이라도......”
강하고 활달한 신할머니 눈에서도 눈물이 가득 돌았다. 신씨는 당시 고위급 장교들을 조르고 설득하고 울고 매달려 운좋게도 장교반 위안부 25명을 모두 데리고 탈출할 수 있었다. 나이 열여덟이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한 신씨는 단신으로 전전하며 힘든 일을 하며 살다 51년 당진에 정착했다.
“다 그놈들이 신세를 망쳐놨지. 보상해도 시원찮을 놈들. 제네바에서도 난리가 났어. 위안부들 보상주고 사죄하라고 말여.”
칠순이 넘은 나이에 어쩌면 이렇게도 시국을 잘 이해할까. 신할머니는 93년 TV를 보다가 일군위안부 얘기가 나오자 스스로 송악면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을만큼 대찬 성격이다.
혈육 한점없이 30년 넘게 정붙여 살아온 남편 김씨가 죽자 빚더미에 앉은 신할머니는 하던 방앗간도 넘기고 이젠 그 옆 단칸방에서 다시 홀홀 단신으로 산다. 생활보호대상자에 정부에서 나오는 위안부 생활지원비로 살아가는 외로운 생활이지만 할머니는 이웃에게 퍼주는 재미로 사신다.
할머니는 이날도 기자일행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며 꼭꼭 싸두었던 외출복으로 갈아 입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