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대시론
마음의 여백이 필요한 때
황규호 / 상록문화제 집행위원장
나는 음악과 미술(특히 노래나 그림)에 관한 한 소질도 없고 무지하며, 어떻게 보면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능력이 없다. 때로는 부모를 원망하여 보지만 그분들인들 아들이 소리와 그림은 물론 모든 것에 재주가 있게 낳아 주시고 싶었겠지, 한탄이나 하면서 지내는 아들을 낳고 싶었겠나 생각되어 원망도 하진 않기로 하였다.
그래도 가끔(어쩌다인지 모르겠다) 전시장에 가보면 서양화와 한국화의 그림이 퍽 대조적임을 볼 수 있다. 서양화는 여백이 없이 전체를 그리고 채색하였는가 하면, 한국화는 그림은 일부이고 여백이 더 많고 여백으로 감정을 표현한 듯 한 것을 보고 있노라면 무지한 나 같은 사람도 차이가 너무 큰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시각이 달라진다.
서양 사람들은 모든 공간을 다 채움으로써 만족을 하는 것 같고 동양 사람들은 공간을 많이 두어 여유를 갖는 마음을 나타내며, 그려진 부분과 그려지지 않은 부분을 함께 봄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끼고 멋을 찾아내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동양과 서양의 그림이 이렇게 확연히 구분되듯이 노래도 그러한 듯 하다.
서양음악에서 쉼표는 생리적인 숨쉬기 조절이나 아니면 다음 가사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 같고, 우리의 노래는 부르는 대목보다 대목과 대목 사이에 낀, 부르지 않는 사이의 여백과 여운을 중요시하고 있지 않나 싶은 것이 무지한 사람의 견해이다.
여백이 있으면 허전한 마음이 들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백이 있음으로 우리는 여유를 갖게 되고 그 여유가 편안함을 주게 되지 않는가? 꽉 찬 여백이 없는 것에서는 빈 것이 없다는 만족감 내지 포만감은 느낄 수 있겠지만 답답함이 주는 조급증이 발동할 수도 있을 듯하여 선조들의 너그러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고 머리를 조아리게 됨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지 않을까?
우리 주위에서 듣는 종소리만 하여도 그렇다.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와 절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가 서로 다른 것은 여백에 깃든 여운의 유무가 결정적 요인이다. 교회의 종소리는 높은 고음으로써 천상으로 사람을 끌어올리는 그런 사이를 허락지 않는 울림새인데 비해 범종 소리는 다 울리고 난 다음에 듣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파고드는 주파의 여운(餘韻), 여정(餘情)이 소리의 주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노래에서는 부르는 대목보다 대목과 대목의 사이, 즉 부르지 않고 쉬는 사이에서 더 긴장하고 흥겨워하며 일체감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는 언젠가부터 그림의 여백이 사라졌고 노래의 대목과 대목에 있는 사이가 없어졌으며, 범종의 여운이 주는 여정이 사라져 가고 있다. 산다는 자체는 서양의 그림처럼 여백이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화에서 표현한 여백이 우리 생활에서 없어진다면 올바른 정신을 과연 갖고 살 수 있겠는가?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하셨다.
우리들은 바쁘다. 정말 급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급하다는 것을 핑계삼아 당진군 전체가 문제가 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데도 소가 닭 쳐다 보듯이 무관심한 체 지나고 있다. 당장 개인적인 이득이 보이지 않으니 순간의 관심도 아까운 것인가?
당진 전체가 경제적으로 회생되지 않는다면 개인의 이익도 챙길 수 없을 뿐더러 파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당진군민 모두가 군 전체 문제를 위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협력하고 협조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남겨 두고 다 같이 당진살리기 운동에 참여한다면 당진경제 회생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