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사회 위해언젠가 학교를 돌려드리겠습니다”

학생들의 축제도 끝나고 시험기간으로 접어들어서 그런지 학교는 여느 때보다 조용하다. 그러고 보니 큰 길에서 학교를 향해 접어드는 길목에는 학교를 상징하는 아치가 새로 서있었다. 투박하게 서있던 입구 아치가 바뀐 것만으로도 학교는 새로워 보인다.

신성대학은 올해로 개교 6주년을 맞았다. 대학유치를 희망하던 군민의 성원을 반석으로 깔고 앉은 학교건물과 어렸던 나무들에서도 이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앞으로 한 10년, 20년이 흐른 뒤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푸른 그늘을 드리워 사색과 고뇌의 냄새가 나는 교정다운 교정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1994년 당시 이사장으로 신성전문대학의 인가를 받은 이병하(65세)씨는 6년째가 되는 지난 2000년 1월 제 3대 학장으로 취임해 현재 학사업무를 관리하고 있다.

기업인에서 교육자로 자신의 변신과 더불어 학교 역시 맨땅에서 상아탑으로 거듭 변모해 가고 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이병하 학장에게 감회가 남다른 일이다.

“처음 대학설립 인가를 받던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고향인 당진에서는 누군가 대학유치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가 뜨거웠고 반면 그때만 해도 대학인가는 요즘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당시 교육계는 대학비리문제로 쑥밭이 되었고 덕분에 대학설립인가 조건이 갑자기 강화되었던 겁니다.”

신성대 설립은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서, 군민의 뜨거운 염원이라는 바퀴를 동력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군민의 성원이 아무리 뜨겁다 해도 누군가는 그것을 짊어지고 가야할 일이었다. 그것이 이병하씨에게는 모험과도 같은 일이었다. 신성레미콘이라는 잘나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중소기업이었다. 또 당시만 해도 국내굴지의 기업을 운영하는 출향인이 없는 바도 아니었다. 허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주위여건이 성숙해진다고 저절로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이 있어도, 또한 뜻이 있어도 그것을 위해 누군가 밀고나가지 않으면 모든 게 공염불이다. 어쩌면 당시 재경당진군민회장을 맡아 자신을 중심으로 고향의 대학설립을 논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이 마지막 책임을 떠안게 된 운명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병하 이사장은 기꺼이 이 운명적인 소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가치의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는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이윤을 얻어내는 기업윤리 아래서 보잘 것 없는 작은 기업을 덩치 큰 기업으로 일궈온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그런 그가 경제적 가치 환산과는 거리가 먼 교육사업이라는 영역에 발을 내디딘다는 것은 분명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병하 이사장이 이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마음 속 어딘가에 언젠가 교육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늘 도사리고 있었기 때믄이다. 남들처럼 공부하기가 여의치 않은 시절이었다. 자칫하면 공부와는 인연을 놓을 것만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우연한 기회들이 그로 하여금 최악의 경우를 피해가도록 도와주었다. 기지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못하고 있을 때 비록 비인가이긴 했지만 중학교 하나가 송악에 생겼다. 후에 송악중학교가 된 학교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할 때쯤 당진농고에는 운좋게도 상과반이 신설되었다. 대학은 가고 싶었지만 갈 형편이 되지 못할 때 그는 서울의 아는 어르신을 찾아가 취직을 했다. 숫기도 없었지만 냉엄한 현실 앞에서 책 세일즈를 하여 학비를 벌었다. 돌이켜 보면 늘 재앙같은 상황에서 불쑥 불쑥 구조선이 되어 나타난 것은 ‘배움의 기회’였다. 최선도 아니고 어찌 보면 차선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배울 기회마저 잃어버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지 않은 것만으로도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돈을 벌면 기회를 놓쳐 안타까워 하는 후학들을 위해 다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뒤로 늘 그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구조선을 얻어타고 그가 강 이쪽으로 건너온 것처럼.

두 번째 이유는 모험과 도전이야말로 그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벽돌을 찍어내는 조그마한 공장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레미콘 업체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과감한 시도 덕분이었다. 당시 레미콘 업계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이병하 사장이 그 사이로 뛰어들 때 주위에서는 많이 말렸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예측대로 대성공이었다.

서울의 모든 사람이 당진이라는 이름을 낯설어할 때 일찌감치 대학부지까지 사놓고 대학설립인가를 냈을 때 서울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이 역시 성공했다. 물론 여기에는 고향사람들의 협조가 뭐니뭐니해도 첫째요인이었다.

이병하 이사장이 대학을 설립한 후 매진한 것은 학교를 반석 위에 올려 놓는 일이었다. 그래서 교육부의 다양한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애를 썼다. 학교다운 면모를 갖추려면 교육부의 지원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 6년.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고 더욱이 지역의 교육문화 센터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고 있음을 알지만 어쨌든 지나온 6년에 후회는 없다.

“그런데 대학 발전이라는 게 한이 없더군요. 더구나 민관의 도움이 없으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저희 신성대학을 많이 사랑해 주셨지만 지역에서 앞으로도 더 많은 관삼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도 지역과 함께하는 대학이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언젠가는 지역에 돌아갈 학교가 아니겠습니까?”

김태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