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지 않아 그림으로 대신했습니다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
"60년대 농활의 추억"
당진주유소 대표 원종경
나의 아버지는 구룡리에서 석고공장을 운영하셨었다. 그럭저럭 공장이 잘 돼 이웃들 대부분이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음에도 난 큰 어려움 없이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서울 유학길에도 올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나는 ‘자진근로대’라는 봉사클럽에 몸담게 되었다. 일찌감치 ‘서울물’을 먹었음에도 상부상조하는 농촌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자진근로대는 주로 방학을 이용해 농촌봉사활동이나 보육원 같은 곳을 방문하는 써클이었다. 그 당시 농활은 계몽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낮에는 농가 일손을 돕고 저녁때에는 글모르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글을 가르쳐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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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사진은 1967~8년도 즈음, 써클친구들과 송악면 오곡리로 농활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나는 농촌계몽소설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상록수’의 고향이 바로 당진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당진으로 농활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친구들은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빡빡머리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사진속에는 맨발인 아이도 있는데 당시엔 물자가 귀했기 때문에 신발없이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도 많았다. 일부는 짚신을 신었고 어쩌다 고무신을 갖게 된 아이들은 신발이 닳을새라 품에 안고 다니다가 돌맹이가 많은 길에서만 꺼내 신곤했다.
#2
두번째 사진은 역시 그 무렵 농사일을 거들다가 점심을 먹고 나무그늘아래서 잠시 쉬고 있는 장면이다. 뒤에 보이는 초가집 모습이 전형적인 당시 농촌풍경을 보여준다. 이 초가집들은 70년대 ‘새벽종이 울렸네’라는 노래와 함께 새마을 운동 바람에 모두 사라졌다.
#3
세번째 사진은 현재 기지시교회 자리에 있었던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가서 찍은 사진이다. 함께 갔던 친구들과 보육원 보모들의 모습인데 뒷줄 가운데쯤 밀짚모자를 쓴 사람이 나다. 우리는 푼돈을 모아 라면같은 비상식량과 과자 등을 사들고 보육원엘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4
네번째 사진은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했을 때인데 당진에서 농활을 끝내고 친구들과 예산 수덕사로 놀러가기 위해 서산터미널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뒤에 있는 완행버스의 모습이 그때를 생생하게 상기시켜준다.
며칠 전 까맣게 잊고 지냈던 고등학교 동창한테서 전화가 왔다. 졸업이후 한번도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는데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고 동창회보도 보내주었고 모임에 꼭 나오라는 말까지 해주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전화한통을 계기로 난 고등학교 졸업이후 30년만에 처음으로 졸업앨범을 꺼내보았다. 그제서야 옛 친구들의 얼굴과 그때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앨범속에는 한때 아나운서로 유명했고 지금은 정치인이 된 류근찬이와 야구해설로 이름을 날린 하일성이가 지금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내년 동창회엔 꼭 참석해 볼란다.r
© 당진시대 · 사진과 이야기는 주민이 들려준 것입니다. 원본 사진에는 워터마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