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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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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고대면 · 2012년 9월 당진시대 게재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재직당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발표됐다. 당시 장인어른은 미군부대에서 근무를 해 미군이 철군할 때 같이 미국으로 가셨다. 그리하여 배우자초청과 자녀초청이란 제도로 처가댁 식구들은 미국 시민권자가 될 수 있었다. 나 또한 미국에서 살게 됐는데 그 당시는 미국에 있는 한국인이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천대받던 시기였다. 그래서 항상 주변 지인들한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후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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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진은 스무살 무렵 소를 타고 이동하는 사진이다. 당시 농가에는 소를 한 마리씩 키웠는데 중요한 이동수단이었다. 소에게 마차도 끌게 하고 사진 속 나처럼 타고 다니기도 했다. 이 소는 우리 마을의 마지막 소였다. 이 소를 팔고나서 소의 역할을 경운기가 대신하게 됐다.

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 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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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사진은 결혼 전, 아내와 임진각에서 데이트하며 찍은 사진이다. 누나가 파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아내가 누나와 언니,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였다.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고 그때부터 아내를 알고 지내다 계속된 구애 끝에 결혼하게 됐다.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물품들은 지금 우리에게 없다. 이민을 가기위해 영주권이 필요했는데 난 배우자초청으로 영주권을 얻으려했다. 영사관에서는 아내와 내가 결혼한 사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 전화통화 내역, 편지 등 모든 것을 내라고 했고 돌려받지는 못했다.

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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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사진은 대호방조제를 막은 후 논을 개간하기 전 딸아이와 놀러가서 찍은 사진이다. 이 때 아내는 괌에 있었다. 아내는 자녀초청으로 영주권을 얻기 위해 우리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딸아이의 호적을 등록하러 갔을 때 호적계장이 엄마이름을 말하라고 했으나 어떤 여자와 연애를 했지만 아이만 내게 오고 누가 엄마인지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

김종성 전 고대면농업경영인회 회장영주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그 시절 —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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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사진은 괌에서 지낼 때 딸아이와 찍은 사진이다. 괌은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5년 정도 지내다보니 고향생각이 났다. 그래서 아내와 나, 딸은 영주귀국을 결정했고 영주권 포기신청을 하러 영사관에 갔는데 포기신청양식이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미국 영주권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사관 직원은 딸아이의 영주권이라도 남겨놓으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지금 생각해도 잘 한 것 같다. 만약 딸아이가 미국으로 다시 간다면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없게 됐을테니 말이다.

정리 서보람 인턴기자

© 당진시대 · 사진과 이야기는 주민이 들려준 것입니다. 원본 사진에는 워터마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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