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로 교통이 발달되기 이전, 교통의 중심지는 해상을 이용한 나루였다. 송악에서 가장 큰 나루 역시 한진이었다. 고대부터 중국을 비롯해 안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한진은 해방 이후에도 경기와 인천, 서울 등을 왕래하기 위한 관문으로 인천행 증기기관선인 일명 ‘똑땍이’ 여객선과 평택시 만호리를 오가는 정기선이 운영되었다.

“(한진포구가 당진에서) 제일 컸어. 그때는 교통이 불편했으니까 인천 다니는 연락선이 두 척이 와요. 하나는 부리포로 들어가고 남원포로 들어가고. 구양도 다리 밑에까지 들어간다고. 여기가 곡창지대 아닙니까. 그땐 차가 드무니까 그걸 우마차로 실어다가 연락선에 실어서 인천 가면은 인천·서울 사람들 다 먹여 살리는 거지” (박창제 씨)

“배가 커서 대지를 못 하니까 조그만한 전마선에다 쌀을 싣고 올라가서 배에다 실어주고 그런 일을 했지. 아침에 여기서 배가 인천으로 가면 또 저녁엔 다른 배가 또 여기 왔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당진이 생활권이 되는데 그때는 여기가 인천의 생활권이었어요. 그럴 정도로 여기 충청도 사람이 인천 가서 국회의원 나가서 당선될 정도로 인천에 충청도 사람이 많이 살았어요.” (유재구 씨)

인천과 당진을 오갔던 정기 여객화물선은 1973년 삽교천방조제의 착공 전 운영이 중단되었다. 인천에서 출발한 정기선은 영흥도를 거쳐 한진에 기착했으며, 맷돌포, 공뿌리(운정)를 들렸다가 삽교천 물줄기를 따라 우강의 남원포, 부리포를 거쳐 합덕 구양도와 아산 선장포를 경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진포구에 기착했던 정기선은 장곡천환, 예산환, 공동환, 이근호, 인충호, 명동호, 해평호, 영창호, 신흥호, 칠복호 등이 있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매일 상·하행선이 각 1회씩 교차 운행되었다. 한진포구의 현재 주차장 자리가 매립되기 이전, 한진리 91번지에 한진여객화물취급소(대표 故 김순만)가 자리했으며, 취급소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우현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