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같은 얼굴에 165㎝의 단신. 오랜 눈물을 거쳐 중년의 나이에 소년처럼 하하하 웃는 전경환 전무에게서 우리는 ‘극복’의 표정이 어떤 건지 읽을 수 있다.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나이들어 보이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많은데도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석문새마을금고 전경환(53) 전무는 나이가 들었어도 나이들어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언제 봐도 웃고있는 얼굴의 미소와 그 미소로 환해지는 표정 때문인 것 같다.

올해로 새마을금고에서 일한 지 30년이 되는 전 전무는 남들이 이르기를 ‘일에 미친 사람’이다. 부인이 가끔 이렇게 말할 정도다.

“당신은 관 속에 들어가 누웠다가도 누가 예금 받으러 오라고 하면 일어나 갈 사람이야.”

어째서 항상 웃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전 전무의 답은 더 가관이다.

“미친 사람이 웃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농 반 진 반으로 던지는 말이지만 이 말 속에는 전 전무가 남다르게 살아가는 삶의 비밀이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의 비법이고 미소의 마법이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떤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 아닙니다. 일의 과정에 자신을 열어놓고 거기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1973년 재건국민운동이 일어나 부락마다 마을금고를 만들던 당시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금고를 운영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30년동안 사람을 만나오면서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일은 다름아닌 미소로써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었고 자신의 어려움도 숨김없이 털어놓아 상대방과 흉금을 없애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미소는 전 전무가 상대방에게 관심을 나타내는 방법이자 도움을 주고싶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일에 미친 사람이 찌든 기색 하나 없이 어찌 저리도 짱짱한지 처음엔 앞뒤가 맞아보이지 않는다.

일에 미쳤다면 적어도 인생의 중요한 뭔가를 잃었다거나 그래서 성공 대신 생의 의미를 잃어 실의에 빠졌다거나 해야 스토리의 앞뒤가 맞는 게 아닌가.

하지만 길게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나면 이 미소가 일의 성공을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로서 선물받은 것임을 알게된다.

금고운영에, 사과 과수원 농사에 바쁜 가운데서도 아직도 매일 4시30분에 새벽기도를 나가는 그가 마지막 기도로 잊지 않는 것이 있다.

“오늘 저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제가 기쁨과 평화를 나눠주게 하소서.”

미소는 남에게 주는 선물임과 동시에 자신의 하루를 채우는 중요한 의미이다.

그렇다고 매사 넉넉하고 가진 게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랜 세월 눈물을 통해 정련되어서 나오는 것이 그분의 웃음이다.

몇 년 전부터 본인이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때까지 그분에게 청각장애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굳이 숨기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만 굳이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려서 홍역을 앓은 후유증으로 얻은 중이염은 군복무의무를 면제받을 정도로 심한 청각장애를 남겼지만 그 때문에 포기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중학교 졸업 후 시작한 교회 풍금반주도 나이 마흔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24년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청각장애인이 피아노를 치다… 갑자기 악성 베토벤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여린 한 인간이 겪는 장애는 인간적인 만큼 훨씬 고통스러웠다.

간신히 자신이 치는 풍금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예배 때 찬송가 몇번을 부르겠다고 하는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경황 중에 가까이 앉은 다른 사람에게 묻고나서야 건반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높이 올려세운 풍금의 커버 뒤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많은 눈물을 흘렸다.

비록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고운 소리로 노래할 수 있고 성한 두 손으로 신을 찬미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운 일이었다.

“게다가 하느님은 제가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많이 주셨어요. 특히 끈기와 굴하지 않는 집념 같은 것이요.”

가난한 살림에 음악공부를 제대로 한 적도 없는 그가 풍금반주를 하게 된 것도 친구 어깨너머로 배운 것을 끈덕지게 연습한 결과였다. 70년대 미을금고에서 회계원을 맡아 일일이 수금을 다닐 때도 그랬다. 그런데 그의 집념이 본격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나이 마흔부터였다.

4남매 중 맏이라는 이유로 공부할 기회를 빼앗겼던 그는 배움에 대한 욕구를 억누를 수 없어 뒤늦게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때가 마흔 살. 봉사의 하나로 여기는 교회 반주를 빠뜨릴 수 없어서 일요일 수업이 있는 방송고 진학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기를 여러 해 한 뒤였다.

심해진 중이염으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방송고에 입학하던 그날을 전경환 전무는 잊지 못한다. 공부에 자신도 있고 천성적으로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그였건만 그의 고등학교 진학을 주저앉혔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장문의 편지도 더불어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날, 아직 봄바람이 채 따뜻해지기 전에 만학도들 가운데 서 있으면서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원망했다. 또 한번 길게 눈물이 흘렀다.

그로부터 8년간 방송대 경영학과를 졸업할 때까지 전경환 전무는 정말 원없이 공부했다. 금고 일도 열심히 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성적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배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지고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도 학습분위기를 만들어주는 1석3조의 효과가 있었다.

작은 아들이 첫 번째 대학입시에 실패했을 때 전경환 전무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 방송고등학교가 있는 홍성으로 갔다. 그리고 방송고 입학 때 자신이 앉았던 그 자리에 아이를 앉히고 이 말을 들려주었다.

“얘야, 봐라. 내가 처음 여기 들어올 때 저기 저 앙상한 은행나무를 보고 얼마나 마음이 미어졌는지 아니? 저 은행이 세 번을 피고 져야 이곳을 졸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봐라. 아빠는 벌써 그곳을 졸업해 대학교 2학년이야. 지금은 까마득해 보이지만 하다보면 어느 새 그 시간은 지나가 있을 거야.”

더러 더러 교만하고 남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은 진실과 진심이 통하는 곳이라고 전 전무는 믿고 있다. 그래서 “머리도 허연 놈이 이제 그만 좀 해라”하고 친구들이 타박해도 아직 즐겁게 사람 만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아이같은 얼굴에 165㎝의 단신. 오랜 눈물을 거쳐 중년의 나이에 소년처럼 하하하 웃는 전경환 전무에게서 우리는 ‘극복’의 표정이 어떤 건지 읽을 수 있다.

김태숙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