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산이었던 수청동에 개발 소식이 전해졌다. 푸른 녹지만 있던 곳이 맨땅으로 밀렸고, 그 위에 고층 아파트들이 세워졌다. 한 동네가 없어지는 것을 보며, 전다한 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은 개발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났다. 이 동네의 토박이었던 이들은 한순간에 ‘외지인’이 된 셈이다. 전다한 소장은 이 사라지는 마을을 기록하고 싶었다. 역사를 전공하면서 더더욱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 그의 고향 당진이었다. 당진의 향토문화를 연구하는 사학자, 29살의 청년 전다한 씨를 만났다.
“당진의 역사, 한 줄이라도 더 찾고 싶어”
당진의 마을 중 안 간 곳이 없고,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진과 관련한 간행물은 모두 수집했다. 무려 1000쪽이 넘었고, 일본어로 기록된 것은 모두 번역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래도 그는 “한 줄이라도 더 찾고 싶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던 아주 오랜 당진의 모습부터 달라지는 그 과정까지 수집하고 기록한 사진만 2만여 장이 넘는다. 그는 “몰랐던 당진의 이야기들을 알면 알수록, 알고싶은 욕망이 샘솟는다”며 “누가 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안 하면 후대에 남길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 사명감과 부담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담아 온 지역의 모습들
송악읍 기지시리에서 나고 자라 기지초, 원당중, 호서고를 졸업한 그는, 군 시절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오래 떠나본 적이 없다. 저절로 그의 관심사는 고향이 됐고, 그 애향심이 지금 일의 바탕이 됐다. 그리고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제가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여행을 데리고 다니셨어요. 포대기를 하고 다닐 때부터 여행을 다닌 거죠. 아버지는 주말만 쉬는 평범한 직장에 근무하셨는데도,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갔어요. 특히 문화유산이 있는 곳을 많이 갔죠. 사찰이나 근대건축물등을 많이 봤고 저절로 저도 그쪽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또 지금의 이 지역을 기록하는 습관도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일본으로 출장을 다녀온 아버지는 당시 300만 원 상당의 DSRL을 사오셨고, 사진을 취미로 삼으며 당진의 옛 모습을 촬영해 왔다. 전 소장 역시 초등학교 1학년, 핸드폰을 조막만한 손에 넣었을 때부터 자신의 동네인 기지시리를 담아왔다. 기지시리에 힐스테이트 아파트가 생길 때는 그 층마다 찍어 놓기도 했다고. 그는 “아직도 내가 왜 지역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것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며 “보통 학자들은 출신지 연구를 거의 하지 않지만, 나는 마치 하늘이 점지해 준 것처럼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덧붙여 “그래서 ‘운명인가보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지역을 연구하는 일, 천상 재밌어요”
그에게 있어 지역을 연구하는 것은 ‘천상 재밌는’ 일이다. 6.25 전쟁 당시 송악읍 반촌리에서 우익과 좌익 단체가 서로 맞붙으며 전투가 일어났던 것은 그 어떤 기록에도 없다. 우연히 그 전투에 참여한 어르신을 만나 주민들이 산 정상에 올라 돌을 굴렸다는 그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할 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숨겨진 당진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전 소장은 어디든 찾았다. 조상과 선조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깊이 있는 구술채록과 기록 연구에 나섰다. 그리고 함께 향토 문화를 연구하는 향토문화연구소도 참여하며 지난해 소장까지 맡게 됐다.
역사적 사료와 구술 채록 더해져
“아미산에 금광이 있었어요. 그래서 면천에 전기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있죠. 면천 송학리에는 금을 제련하는 금방앗간이 있었고, 면천 자개리에서는 삽교천이라는 하천에서 사금도 많이 나왔어요. 또 지금의 남산은 원래 두 개의 산이었어요. 수영장이 있던 산과 상록탑이 세워진 봉대미 산이요. 원래 남산은 지금보다 높았으나, 그 흙을 퍼서 지금의 당진 시장이 있던 논을 메꿨고요. 그리고 송악읍 반촌리에 있는 나라사랑공원은 원래 독암고개였어요. 여우가 살고, 도둑이 나왔던 아주 험한 고개였죠. 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 이 고개를 지나 오가야만 했어요.”
당진을 알면 알수록 기록할 것들이 넘쳤다. 당진의 시장, 당진의 고개, 당진의 산, 당진의 섬, 당진의 충·효·열, 당진의 포구, 당진의 특수지명 등. 그가 자료 수집하고 집필하고 싶은 것들이 한 가득이다.
구술채록을 하면서 사라질뻔했던 이야기를 마주하기도 한다. 우연히 당진시대 기사 한 줄에서 ‘기지초등학교 1회 동문에게 선물을 증정했다’는 내용을 전 소장은 보게 된다. 그 길로 수소문한 끝에 유일하게 남아 있었던 1회 졸업생을 만난다. 99세의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기지초등학교가 이전했다던 이야기, 기지시 시장이 1, 3, 6, 8일 총 한 달에 열두장(십이장)이 열렸던 이야기 등 숨겨졌던 이야기들을 채록하게 된다. 그는 “구술과 역사적 자료를 검증하면 맞는 경우가 많고, 그 과정에서 시너지가 발휘된다”고 말했다.
수청동에 이어 우두동까지, 사라지는 마을들
당진의 역사를 좇으면서, 아쉬운 것은 사라지는 곳들이다. 그는 “현재 시급한 것이 CGV 당진 옆에 있는 우두리”라며 “우두동의 지명 유래가 된 우두실이 있는 곳인데다가 샘이나 원주민의 삶,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개발 소식으로 인해 향후 수청동처럼 사라질 수 있는 곳”이라고 전했다.
“당진의 시가지가 팽창하면서 원주민의 삶과 흔적이 사라지고 있어요. 이것을 남길 필요가 있는데 개인의 힘으로는 어려워요. 평택 같은 경우에는 문화원과 문화재단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어요. 당진도 지자체에서 전문성 있게 용역을 맡겨서라도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가 역사적인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정체성’에 있다. 특히 외지인의 유입이 많아지는 당진은 원주민의 지향해 온 정체성을 잃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는 “급속도로 개발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라며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남겨야 한다”고 전했다.
“함께 기록할 사람 있었으면”
그의 바람이라면, 함께 지역을 기록할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세 가지의 말을 남긴 그는 첫 번째로, 언제든 당진의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연락을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마을 단위까지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 달라”고 전했다. 두 번째는 사라지는 마을, 기록하고 싶은 마을이 있을 때도 연락하는 것이다. 그는 “간행물로 기록하고 싶은 마을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협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당진의 역사 연구와 구술 채록을 함께 할 사람을 찾는 것이다. 전 소장은 “소모임이나 동아리 등 교류의 장을 만들고 싶다”며 “언제든 찾아달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