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가 발생한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한국전쟁 당시 당진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까지 사회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던 지역이다. 사회적 갈등이 한국전쟁을 통해서 폭발했고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은 희생자가 났다. 말이 희생이지 학살이 자행됐다. 학살의 이유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의해 점령이 됐고 부역 혐의자를 잡아서 어떠한 법적 절차 없이 경찰에 의해, 당시 국가 권력에 의해서 학살됐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합덕지서 앞에 창고가 있었는데 약 300~400명 정도가 갇혀 있었다. 그 사람들이 전부 끌려가 죽지는 않았겠지만 대부분 희생됐다는 증언이있다. 과거 진실과 화해 위원회 1기에서 이곳에서 희생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지만 유족이 동의하고 발굴을 요청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온 것이다.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학계에서 상당히 주목했다. 늦었지만 이렇게 발굴이진행되고 있다.
현재 유해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 인가?
1970년대 전파관리소가 들어서며 평탄화 작업이 됐지만 과거 이곳은 도로를 타고 산골이 형성된 지역이다. 전파관리소와 관사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훼손됐을 것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이곳에 기적적으로 봉분이 만들어져서 전파관리소도 이것까지 손대지 못했던 걸로 본다. 현재까지 약 58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합덕·우강지역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배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에서 많은 희생이 났던 것은 소들 강문인 예당평야와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은 토지가 넓은 대신 그 토지의 다수를 부재지주가 소유했다. 우강면 강문리 같은 경우 자작농이 16%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한국전쟁이 나면서 곧바로 이승만 정부가 전쟁 중에 이른바 전향자 보도연맹을 조직해 그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예비 검속해서 전부 학살을 한 것이다.
이곳 현장의 특이점은 무엇인가?
보도연맹은 1950년 7월 12일에 예비 검속해서 전부 학살하는데 보도연맹 희생자도 이곳에 묻힌 게 아니냐는 추측도 하고있다. 1차적으로 사상적 차이를 떠나서 같은 마을에 있던 동료, 가족이 희생되니까 분노가 치밀고 인민군이 들어와 적대 정권에서 부역하는 경우가 생겼다. 1차 보도연맹 그다음에 2차 우익 인사, 9월 28일날 수복이 되고 10월에 부역 혐의자들을 대거 체포해서 이곳에서 학살을 하게 됐다. 혐의정도에 따라서 희생이 된 경우도 있지만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평소에 눈엣가시였던 사람들을 학살한 경우도 있어 희생이 너무많았다.
인근 아산 같은 경우는 1살 먹은 어린애까지 희생이 됐다. 아산 같은 경우는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진은 그나마 남성 위주로 희생자가 있었다는 특이점이 있다.
유해 발굴현장을 보니 참혹하다.
여러 군데에 걸쳐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학살지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처참한 경우는 못 봤다. 그 예로 대창이 나왔다. 그때 당시 유족 증언에 의하면 총알이 아깝다고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 밀어 넣었다는 증언을 받았고, 그리고 유해가 전부 팔이 뒤로 묶인 채 엎어져 있다. 이는 손을 뒤로 묶어 저항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살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인 골령골도 학살할 당시에 손을 묶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끔찍했다고 밖에 표현 할 길이 없다.
이곳 이외에도 지역 곳곳에서 학살이 진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우강, 합덕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분들이 희생됐는데 이곳 은골 학살지 외에 남쪽으로 우강면 송산리 솔뫼성지 입구에도 희생지가 있다는 증언이 있다. 또한 순성과 신평, 석문, 정미면과 대호지에서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서 지금까지 그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자치단체가 적극적으로 지역에서 있었던 과거의 끔찍했던 사실을 밝혀내고 명예회복을 시킬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진실과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