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공식품 속 국내산 원재료 사용률이 얼마나 되는지 물으면, 농민들의 대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대기업은 0%, 중소기업만 조금 쓴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라 현실이다. 특히 고추장 같은 대표 전통 발효식품조차 국내산 고춧가루 비율이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사례가 거듭 확인된다.
가공식품 속 국내산 원재료, 왜 0%인가?
주요 브랜드 고추장 원재료 표시를 보면 중국산 ‘고추양념(다대기)’ 의존도가 높다.
△A업체: 고추양념(중국산/고춧가루 6.2% …) △B업체: 고추양념(고춧가루 9.3% / 중국산) △C업체: 국산 고춧가루는 1.8% 수준, 고추양념 속 고춧가루는 5.3% 중국산 표기
소비자단체 조사(2022~2024년) 결과, 일부 대기업 제품은 국산 고춧가루 0%인데도 붉은 빛과 매운맛을 전량 중국산 원료에 의존한다. 소비자가 ‘국내산 태양초 고추장’이라 믿고 사는 제품의 뒷면 라벨이 실상은 ‘국내산 0%’인 셈이다.
‘태양초=국내산’이라는 오해
문제의 핵심은 ‘태양초’라는 용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태양초를 “햇볕에 말린 고추”라고 풀이한다. 즉, 건조 방식일 뿐 원산지와 무관하다. 그러나 포장 전면에 큼직하게 인쇄된 ‘태양초 100%’ 문구는 소비자가 ‘국내산 태양초 100%’로 오인하게 한다. 중국산 고추양념과 소량의 국산 고춧가루를 섞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구조가 고착된 이유
첫째, 가격 격차 때문이다. 중국산 고추 원료는 국내산보다 절반 이하로 저렴해 제조원가를 크게 낮춘다.
둘째, 표시기준 사각지대가 있다. ‘고추양념’처럼 복합원재료 내부 원산지는 라벨 뒷면 성분표에서도 확인하기 어렵다. 셋째, 유통 관성이 작용한다. 업소용·B2B 시장은 색·점도·가성비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중국산 다대기를 채택하는 관행이 고착화됐다.
해외와 비교되는 한국의 제도
유럽연합(EU)은 가공식품의 주원료 원산지를 소비자가 혼동할 수 있을 경우 의무적으로 표시하게 한다. 일본도 ‘국산 원료 사용률’ 표기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태양초’ 같은 용어가 원산지를 연상시키는데도 제도적 제재가 미흡하다. 그 결과, 소비자는 여전히 “빨갛게 포장된 국산”을 산다고 믿지만 실상은 외국산이 주재료인 상황이 이어진다.
개선을 위한 다섯 가지 제언
△전면 2줄 의무표시제: 고춧가루 총 함량 / 국내산 비율을 전면에 명확히 표시 △‘태양초’ 용어 가이드라인: 건조방식 용어임을 명확히 하고, 원산지 연상 표현 제한 △QR 기반 원료 추적제: 로트별 고
춧가루·양념 원산지와 함량을 QR코드로 확인 △공공조달·학교급식 가점제: 국산 함량이 높은 제품을 우선 조달해 시장 신호 강화 △소비자 라벨 교육 캠페인: “태양초≠국산”, “고추양념=복합원재료”라는 사실을 알리는 인포그래픽 홍보, 나아가 국내산 원료 사용을 일정 비율 이상 의무화하는 법제화 논의도 필요하다. 최소 30% 이상 국산 사용을 강제해야 ‘국내산 0%’라는 현실이 개선될 수 있다.
붉은 포장보다 붉은 데이터
값싼 수입산이 당장의 가격 인하 효과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국내 농업이 무너진다면 결국 소비자의 선택권도, 국가의 식량주권도 사라진다. 농업을 지키는 길이 곧 소비자와 국가를 지키는 길이다. ‘국내산 0%’라는 농민들의 푸념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다. 하지만 모든 제품이 그렇지는 않기에, 정확한 라벨링과 투명한 정보 공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법은 단순하다. 크게, 정확하게, 즉시 보이게 하는 것. 전면 2줄 표시와 QR 추적만 시행돼도 소비자는 더 똑똑해지고, 제조사는 더 정직해질 수 있다. 붉은 포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붉은 데이터다.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라, 소비자가 신뢰할 수 있는 투명한 정보야말로 우리 농업과 식탁을 지키는 첫걸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