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고 자란 마을 이름은 ‘채운리 탑동’이다. 탑이 있던 동네라 ‘탑동’이라 했겠으나 우리 동네에서 탑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넓은 밭 한 귀퉁이에 탑의 일부였던 옥개석, 관모를 쓴 석불 일부, 머리 부분을 잃어버린 석불 형태의 돌 하나가 서 있었다. 선머슴 소리를 들으며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놀던 어릴 시절에도 그 정체 모를 하얀 돌들에 눈길이 머물렀는데 대학에 가서야 그것이 불교 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5남매 중 홀로 딸이었던 나를 동네 짓궂은 ‘새집 아저씨’는 채운 다리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놀려댔다. 채운 다리는 바닷물이 마을까지 쑥 들어온 갯고랑에 놓인 다리였는데 채운이라는 아가씨의 효심에 감동해 당나라 사신이 만들어 줬다는 전설이 깃든 다리다. 또 초중고 다닐 때 셀 수 없이 소풍을 갔던 작은 절 영랑사는 당나라 태종의 딸 영랑 공주가 만든 절이라 하니 당나라와 활발히 교역하던 백제의 흔적이 고향 땅 곳곳에 스며 있다.

쉰 중반이 되어 역사 공부를 더 하고 싶어 들어간 대학원에서 『한국불교사 (고대)』를 공부하던 중 내 고향 내포 지역(삽교천 유역의 당진 서산 예산)에 유독 백제 시대의 특별한 불교 유산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전하는 백제 불상 중 가장 앞서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바로 서산시 운산면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이고 예산 사면석불, 태안 마애삼존불, 서산 마애삼존불까지 모두 큰 의미가 있는 백제 불상이라고 한다. 이렇게 중요한 불상들이 왜 이 지역에 몰려 있을까? 신기하고 궁금해 자료를 더 찾다가 의문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글을 찾았다. 불교미술사 권위자인 간송미술관 최완수 소장의 「내포 지역의 불교」였는데 알고 보니 이분도 내포 지역 예산 출신이다.
최완수 선생의 글에 의하면 백제 문주왕(475-477)때 수도를 웅천(공주)으로 옮긴 뒤 내포가 백제를 지탱해 주는 해양 세력의 근거지가 되었고 중국에서 들어온 선진 이념이었던 불교가 이쪽으로 유입,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백제 지배층에게 전파되었다고 한다. 당시 내포 지역의 중심지는 큰물현(지금의 당진시 합덕, 예산군 고덕과 봉산 일대)인데 예산의 사면석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마애불 양식의 불상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태안에 마애삼존불이, 운산에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백제 최고의 마애삼존불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사람 키 이상의 거대한 마애불이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발견되는 곳은 백제 시기 이 지역밖에 없는데 이것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나 부여보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었다는 증거다.
이 글을 읽으며 백제 시기 내포 지역을 상상하니 고려 시대 국제무역항 벽란도가 떠올랐다. 중국, 왜,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활발히 오갔던 무역항 벽란도에서 ‘코리아’라는 이름도 탄생했다. 당나라 당, 나루 진을 쓰는 당진, 당진이 바로 백제 때의 벽란도가 아니었을까? 지역의 이름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폐사지의 유물이 마을에 굴러다니고 당나라와 연관된 채운 다리며 영랑사가 존재하는 것은 쉽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내포 지역이 가장 잘 나가던 시기의 유산인 ‘백제의 미소’가 보고 싶어졌다. 어릴 적 아무 것도 모르고 다녔던 영랑사에도 가고 싶어졌다.
가을이 깊어가던 일요일 아침 친구와 함께 전라남도 순천을 떠나 서산으로 차를 몰았다. 첫 번째 목적지는 백제의 미소 ‘마애삼존불상’이 있는 서산시 운산면이다. 중학교 때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는 그 불상이 보고 싶어 당진에서 홀로 버스를 타고 운산에 간 적이 있다. 운산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마애불이 있는 곳까지 매우 먼 길을 혼자 걸어갔는데 왜 그랬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 뒤 여러 번 갔지만 이번 방문은 거의 20년 만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이 표지에 새겨져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 내포 지역 부분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고 길을 떠났다. 백제의 미소를 누구보다도 잘 설명하시던, 나도 두세 번 만난 적 있는 성원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가을 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 녘에 뵈는 잔잔한 모습입니다.”
옳거니! 우리가 딱 좋을 때 가는구나! 그 시간에 맞추려고 보원사지를 먼저 들렀다. 며칠 전 보원사지 5층 석탑이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터라 더욱 반가운 마음에 보원사지로 달렸다. 고풍리 저수지 지나서 붉은 단풍길을 달려 도착한 보원사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붉은 태양이 보원사지 뒷산으로 넘어가면서 뿌려준 노을을 받아 폐사지 둘레의 산봉우리들은 빛의 예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상왕산 보원사는 백제 시대에 이 지역 대부호가 세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통일신라 때는 멸망한 백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끝까지 싸웠던 이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화엄십찰로 지정해 조정에서 지원해 줬다고 하니 보원사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출토된 통일신라 시기에 제작된 철조 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철불로 경주 석굴암 본존불과 닮았다. 여러 유물로 짐작하건데 보원사는 고려 때까지도 수덕사와 함께 내포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었을 것이다. 해가 넘어간 상왕산 너머에는 역시 백제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심사도 있으니 이 지역의 불교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국보로 승격되는 5층 석탑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백제의 전통과 통일신라 기단 형식이 결합된 고려 시대 대표적인 석탑. 당대 최고의 석공이 새겼을 팔부중상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했고 보물이든 국보든 현대인의 잣대에 무심한 석탑은 덤덤한 모습으로 서산에 퍼지는 노을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리구에 담겨 있었을 깨달은 자의 사리는 먼지처럼 사라졌고 탑 위의 찰주는 녹슬었지만 늘 한 곳을 향하는 지남철처럼 꼿꼿하게 서서 눈맑은 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을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급히 마애삼존불을 향해 산길을 올랐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 수 없어 마지막 몇 계단은 뛰어 올랐다.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드니 너무나도 익숙한 세 부처님이 환하게 나를 맞아 주셨다. 온몸에 은은한 주홍빛 노을을 받으며 ‘이제 오느냐?’ ‘어서 오너라.’ ‘잘 왔다.’ 염화미소로 전하는 그 따뜻한 환대의 말을 나는 들을 수가 있었다. 변함없는 모습에 안도하며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드린 뒤 앞산을 보니 해가 꼴깍 넘어가고 있었다.

이 곳에 마애불을 새긴 석공은 분명 이 근처의 모든 산봉우리들을 1년 365일 내내 오르고 또 오르며 어디에 어떤 방향으로 새겨야 좋을지 관찰하고 또 관찰했을 것이다.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마애불이 보고 있는 방향은 ‘동동남 30도’로 동짓날 해뜨는 곳이며 일 년이 시작되는 곳으로 경주 석굴암도 같은 방향이라고 한다. 내포에 살던 백제의 석공과 경주에 살던 신라의 석공이 서로 의논한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똑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일까?
깊은 산 계곡의 높은 벼랑에 불상을 새긴 것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금이야 계단과 너른 마당을 만들어 놨지만 1959년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아무런 받침대가 없는 벼랑 중턱에 거대한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건축은 당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인데 그렇다면 7세기 전반 서산마애삼존불을 탄생시킨 내포지역의 경제력과 기술력은 당시 최고 수준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지만 평면에 그린 불화같은 느낌을 주니 이 불상을 새긴 석공은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도력이 매우 높은 스님이었을 것 같다.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나도 입꼬리를 내리지 않는 세 부처님은 노을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보며 더 활짝 웃으셨다.
그날 잠은 당진 영랑사에서 잤다. 어릴 적 소풍 다닐 때는 넓은 마당과 솔숲에 둘러싸인 대웅전 하나밖에 없던 아주 작은 절이었는데 지금은 산림욕장도 생기고 마당은 차를 수십대나 댈 수 있을 정도로 넓어졌으며 요사채도 많이 생겼다. 당나라 태종의 딸 영랑 공주는 왜 당진에다 절을 지었을까? 상인들을 따라 백제 구경 왔던 영랑 공주가 잘 생긴 스님을 만나 절을 지어줬을까? 당진하면 떠오르는 술 면천 두견주를 만든 사람의 이름도 ‘영랑’이다. 영랑사를 만든 당태종의 딸 영랑 공주와 고려 1등 개국공신 복지겸의 효성스런 딸 영랑 아씨. 백제와 고려라는 시대 차이는 있지만 1000년 넘게 전해진 두 여인의 똑같은 이름과 함께 당진의 오래된 역사를 상상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예불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날 내포 지역 불교 유적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당진시 정미면에 있는 안국사지로 향했다. 고등학교 때 국사 선생님이셨던 김남석 선생님(현재 면천 3.10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관 관장)이 안내해 주셨다. 내가 안국사지를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안국사지에 특별한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큰 배처럼 생겨서 배바위라고도 하는 이 바위는 사실 ‘매향비’다. 고려 시대 서해안에서는 향나무를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묻는 매향 의식을 했는데 이때 참여한 향도들의 명단과 소망을 새긴 것이다. 1000년 미륵불이 하생할 때 침향목을 꺼내 올리면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는 불교 민간신앙의 유물이다. 매향 내용이 안국사지 배바위 두 곳에 새겨져 있지만 마모가 심해 글자를 읽을 수 없다.

절을 짓든 향나무를 묻든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인 ‘향도’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서로 어울리며 먹고 마시고 함께 일하는 모임이다. 마애삼존불과 석탑, 매향과 미륵불을 세우기 위해 향도를 꾸려 함께 먹고 일하고 술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내포지역은 백제 초기부터 고려까지 자그마치 1400년 동안 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이 여러 바위에 새겨져 있고 지역의 이름에 남아 있다. 그렇게 남긴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환생해서 다시 살아갈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었을까? 오늘도 동동남쪽 30도를 향해 활짝 웃으며 서 있을 마애삼존불은 그 답을 알고 있을 것만 같다. 답사는 선조들의 마음을 더듬는 일이다.

>>김양오 작가는
(당진 출신 역사동화 작가)
- 당진 탑동초·호서중·호서고 졸업
- 인하대학교 사학과 졸업
- 대표작 <도자기에 핀 눈물꽃>이 세종도서, 청소년 북토큰 도서, 전북교육청 추천도서 등으로 선정. 이 외 <백 년 동안 핀 꽃>, <꿈과 마음이 담긴 집 몽심재>, <아리아리아라리요>등 출간
- 현재 국립순천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공부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