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사라질 위기에 놓인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 획취재를 연재한다. 영상은 유튜브 ‘당진방송’을 통해 시청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서해안 교통의 중심지 ‘ 한진포구’
송악읍 한진리는 예부터 평택을 거쳐 인천과 서울로 향하는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던 서해안 교통의 요충지였다. 삽교천방조제가 생기기 전,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려는 당진사람들에게 한진포구는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방우진 전 한진리 이장(77)의 기억 속에는 선친 故 방상연 씨로부터 이어져 온 나룻배 ‘한흥호’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배 이름이 ‘한흥호’였어요. 한진의 흥안(興安), 즉 우리 마을이 흥하고 편 안해지기를 바라는 뜻이 담겼죠.”
1950년대 말 경부터 운행을 시작한 한흥호는 한진포구와 평택 포승 읍 만호리를 하루 두 번 오갔다. 오전 11시와 오후 2시, 배가 뜰 때면 포구는 인천과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농산물을 내다 팔려는 상인들로 북적였다.
19살 어린 나이에 병환 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배를 몰기 시작한 방 전 이장은 기관사와 항해사 면허까지 취득했고 1969년부터 약 10년 동안 한흥호를 운영했다. 32 명의 정원을 실어 나르던 그 길은 지금의 서해대교가 대신하고 있지만, 배를 타고 평택을 거쳐 용산터미널(서울)까지 가던 유일한 통로였다.
바다를 메우며 바뀐 포구
과거 한진리는 논농사보다 어업과 염전이 더 유명한 동네였다. 현재 새롭게 조성된 어시장과 주차장 일대는 원래 바다였다. 노적봉이라 불리던 작은 산을 허물고 메워 염수납장(소금 창고) 을 만들었다는 방 전 이장은 “지금 동우횟집 자리가 노적봉 자리”라며 “지역 어른들이 노적금산을 허물어서 한진에 큰 부자가 나오기 어렵다며 아쉬워하곤 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산을 헐어 만든 염수납장과 바다를 매립해 만든 어시장은 한진이 겪어온 변화의 증거다.
방 전 이장의 선친 역시 나룻배 운영과 더불어 송악염전, 대동염전 등 세 곳의 대규모 염전을 경영했다. 현재 GS EPS 기름탱크 자리와 복운리 일대에 염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금값 하락과 경영난은 혹독했다. 생산 비용보다 판매가가 낮아지면서 결국 염전은 헐값에 팔려 나갔고, 선친은 그 스트레스로 건강을 잃었다.
바다를 삶으로 버텨낸 주민들
배 목수였던 박창제 어르신(81)은 9살에 한진에 정착해 포구의 전성기를 목격했다. 박창제 어르신의 기억 속 한진포구는 “당진에서 가장 큰 포구”였다. 당진포구문화구술연구용역 기록에 따르면 한진에는 민어, 병어, 삼치, 꽃게가 지천이었고 인천 강화에서 배들이 십여 척씩 몰려와 고기를 잡았다고 수록돼 있다. 박창제 어르신의 아버지는 노적금산 인근에서 배를 수리하는 일을 했다. 어르신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배 목수 일을 배웠다. 가난하던 시절, 헌 배를 사서 고쳐 쓰던 이들에게 그의 손길은 곧 생명줄이었다.
“예전에는 다들 형편이 어려우니 새 배를 못 샀어. 다 헌배 사다가 고 쳐 썼지.”
풍어제의 전통 잇는 마을
현재 마을을 이끄는 서승만 이장 (63) 또한 평생을 한진에서 살았다. 그는 한진포구를 “역사와 관광이 공존하는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풍어 당제는 뱃사람들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한진리의 오래된 전통이다.
마을 당산에는 지금도 당집이 남아 있으며, 매년 첫 용날이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올린다. 한진리는 현재 약 84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서 이장은 “고령화가 심해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야 마을이 유지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다행히 최근 조성된 해 안 둘레길과 아름다운 일출·일몰 덕분에 관광객이 늘고 있는 점은 희망적이다. 서 이장은 “마을 주민들이 한뜻으로 뭉쳐야 후손들에게 좋은 터전을 물려줄 수 있다”며 한진의 활기가 계속되기를 소망했다.
생생한 기억 속 한진
지금의 한진포구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연락선도, 염전도, 노적봉도 사라졌다. 그러나 바다를 터전 삼 아 살아냈던 사람들의 기억은 여전하다. 배를 몰던 청년은 어느덧 일흔이 넘은 노인이 되었고, 밤새 배를 고치 던 목수의 손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남았다. 그럼에도 한진 사람들은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포구의 풍경은 변했어도 사람들의 기억 속 한진은 아직도 나룻배가 오가고, 염전의 소금 냄새가 퍼지며, 노을이 붉게 물드는 마을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