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어느 토요일에 불출마 선언을 했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늘 그렇듯 탑동초등학교 사거리로 교통지도를 나섰다. 채비를 마친 내게 아내가 툭 던진 한마디는 무거웠다. “언제까지 할 거야?” 화가 나 “죽을 때까지!”라며 퉁명스레 돌아서는데, 뒤통수에는 “돈은 안 벌고…”라는 아내의 날 선 진심이 꽂혔다.

사거리에 서서 교통지도를 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직장인으로서 적당히 시의원 타이틀을 유지하며 4년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알량한 자존심이나 잘란 척하느라 불출마를 선언한 것은 아닌가 싶어 마음이 복잡하였다. 무엇보다 지난 8년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어온 교통지도를,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결국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에 못내 섭섭하였다.

스포츠나 바둑에 ‘운7기3’이 있다면, 선거판에는 ‘구도7 캠페인3’이 존재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당선도 오롯이 나의 능력 덕분은 아니었다. 4년 전에는 2명을 뽑는 지역구에서 민주당 단독 공천을 받았고, 8년 전에는 확실한 재선의원이 표를 독식하는 바람에 나머지 후보들이 잔여 표를 쪼개 먹는 구도속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내가 어부지리를 얻었다. 이처럼 선거의 구도는 철저한 눈치 게임과 같다. 평소의 평판은 아주 미미한 변수일 뿐, 진영 간 후보 단일화에 목을 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선거 캠페인에서는 고(故) 이해찬 의원의 ‘3실(진실·성실·절실)’이 명구(名句)로 통한다. 그러나 현실 선거의 비극은 후보자가 실제로 3실을 갖추었느냐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그렇게 느끼게 만들 수 있는가’에 달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선거는 마케팅이 되고, 선거운동은 뻘짖이 되며, 공약은 ‘개소리’와 접점을 맺는다.

우리는 대의민주주의를 선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추첨에 의한 집정관 지명은 민주적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다”라고 했다. 선거는 선출직이 권력을 정당하게 위임받았다는 착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는 행사일지 모른다. 우리는 당선자가 우리보다 우월할 것을 기대한다. 그들은 공동체의 많은 일을 결정하여야 하는데 고려해야 할 변수는 많고 시간은 별로 없다. 미래의 불확실한 결정을 맡기기 위해 유권자는 후보의 원칙과 신념을 보고 이성적 선택을 했다고 자위하지만, 정작 당선된 정치인들이 점집을 드나든다는 소문 앞에서는 허탈해질 뿐이다.

우리는 늘 후보자의 능력, 신념과 신뢰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생각한다지만. 결국 투표소 안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선거는 억눌린 정서를 배출하는 대리만족 행위에 가깝다. 그렇기에 선거운동은 철저히 모험을 피하기 위해 익숙한 것을 선택한다는 ‘단순 노출 효과’를 노리는 광고 기법을 따른다. 매일 아침 사거리에서 거대한 이름표를 목에 걸고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일, 숏폼 영상 속에서 망가짐을 불사하는 기행(奇行)은 모두 ‘성실’을 연출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제정신이라면 하지 못할 이 미친 짓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오직 권력에 대한 ‘절실한 욕심’이다.

이 욕심에 사로잡힌 정치 지망생들은 평소 밭갈이, 스킨십, 지역구 관리라는 이름의 표심 모으기’에 전념한다. 정작 공동체를 위한 본질적인 고민, ‘소는 누가 키우나’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다. 겸손하고 친근한 태도가 공익적 판단을 할 것이라는 근거가 되지 못함은 물론이고 시선을 받고자 하는 뻘짓이 그의 능력치에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그의 저서 《개소리에 대하여》에서 “우리는 대부분 개소리를 알아차리고 현혹되지 않을 정도의 자각을 갖추고 있다고 자만한다”고 꼬집었다. 선거철마다 쏟아지는 화려한 개소리와 공약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과연 길을 잃지 않고 본질을 꿰뚫어 볼 자신이 있는가. 홈쇼핑에서 잘못 산 물품은 반품이라도 되지만 우리의 선택에 대한 피해는 최소 4년간 유지된다. 그것도 다수가 선택하였기 때문에 내가 보는 피해이다.

불출마를 선언하고 내려다본 사거리의 풍경은 유독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