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획취재를 연재한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매년 2월이면 대호지면 적서리 마을회관 앞마당에 주민들이 모인다. 점차 잊혀져 가는 ‘볏가릿대 세우기’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사가 시작되자 어르신들의 구수한 농요 소리가 겨울 들녘에 울려 퍼지고, 노인회장이 볏가릿대를 천천히 눕힌 뒤 장 대 꼭대기에 매달린 곡식주머니를 조심스레 풀며 힘차게 외친다.
“풍년이요!”
짧지만 우렁찬 외침 속에는 단순한 풍농의 기원을 넘어, 고령화와 현대화의 거센 흐름 속에서도 조상 대대로 이어온 전통의 맥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적서리 주민들의 간절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당진시에 따르면 대호지면 적서리는 당진에서 볏가릿대 세우기 행사가 이뤄지는 5 개 마을 중 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정월대보름에 세워 머슴날 눕히다
볏가릿대 세우기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풍습이다. 195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대호지면 적서리에서는 마을 5개 반마다 각각 볏가릿대를 세우며 주민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했다.
남기창 노인회장은 “방조제가 생기 기 전에는 마을 곳곳에 우물이 있었고, 물이 가장 잘 나는 샘에서 고사를 지냈다”며 “현재 4반에 위치한 우물은 아직도 물이 나오지만 농지 정리와 관정 개발 이후 대부분의 우물은 사라졌다”고 말했다.
마을 공동체의 중심이었던 우물이 사라지면서 각 반별로 진행되던 볏가릿대 세우기 행사도 점차 하나로 통합됐고, 지금은 노인회 주관으로 마을회관 앞에서 주민들이 함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주민들의 기억 속 볏가릿대 세우기는 흥겨운 공동체 행사였다. 정월대보름에 장대 꼭대기에 곡식주머니를 매달아 세운 뒤, 보름 후 음력 2월 초하루인 ‘머슴날’에 장대를 눕혀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
차유정 전 노인회장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볏가릿대를 세워왔다”며 “머슴 날 곡식주머니를 열어 쌀 상태를 보고 풍년 여부를 가늠했다”고 설명했 다. 이어 “쌀이 그대로면 중간 풍년, 불어 있으면 대풍년이라고 여겼다”고 덧붙였다.
과거 일부 지역에서는 곡식주머니에 오곡을 넣기도 했지만, 적서리에서는 전통적으로 쌀만 사용해 왔다. 적서리에는 볏가릿대 세우기와 관련된 독특한 풍습도 전해 내려온다.
정월대보름이면 일부러 솥에 밥을 가득 해두고, 이웃들이 몰래 훔쳐 먹는 풍습이었다.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 누구든 배불리 먹고 한 해를 든 든하게 시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인은 이를 나무라기보다 오히려 넉넉히 음식을 준비해두곤 했다고. 남기창 노인회장은 “솥 안에 파래로 만든 청티주먹밥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며 “부잣집에서는 여럿이 배불리 먹으라고 일부러 많이 만들어 놓았다”고 회상했다.

‘붉은 쥐’ 지명에 담긴 전설
한편 적서리(赤鼠里)는 이름 속에도 여러 설화를 품고 있다. ‘붉을 적 (赤)’과 ‘쥐 서(鼠)’를 써 ‘붉은 쥐’라 는 뜻을 가진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붉은 쥐가 많아서, 또는 마을 지형이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오는 형상을 닮아 이름 지어졌다는 설도 전해진다.
마을에는 지명과 관련된 흥미로운 전설도 남아 있다. 적서리 자연부락인 뱃마을(큰말)에는 ‘고양이 바위’가 있었다. 주민들은 붉은 쥐 형국인 마을이 고양이 바위 때문에 번창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결국 주민들 이 바위를 깨뜨렸다. 이후 마을이 번성하고 후손이 많아졌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구전되고 있다.
선녀골에는 삼신할매의 공깃돌 전설을 간직한 ‘개구리바위(선녀바위)’도 있다. 삼신할매가 공기놀이를 하다 잃어버린 돌을 선녀들이 찾는 것을 도와주지 않자, 화가 난 삼신할매가 선녀들의 승천을 막았다는 이야기다. 결국 선녀는 공깃돌 위에 앉아 하늘을 그리워하다 죽었다는 애틋한 설화가 전해진다.
1톤 트럭 크기의 이 바위는 주민들이 칠월칠석마다 액막이 고사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지만, 도로 옆에 있어 훼손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남기창 노인회장이 직접 바위를 땅에 묻어 보존하면서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밖에도 왜구를 피해 숨었다는 ‘방구(防寇)바위’, 장수의 손자국이 남아 있다는 ‘장수굴’ 등 적서리 곳곳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갯벌과 염전의 기억… 반농반어 마을
오늘날 적서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마을 면적의 70%가 갯벌이었던 반농반어 (半農半漁) 마을이었다. 갯벌을 기반으로 한 어촌계는 주민들의 가장 중 요한 생계터전이었다. 송연덕 이장은 “대호방조제가 준공되기 전까지 주민들의 주된 소득원은 바다였다” 며 “갯지렁이와 굴, 실치 등이 많이 잡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굴 채취가 활발했고, 샘표간장 공장에 소금을 공급하던 대규모 ‘샘표염전’도 운영됐다. 주민들은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대호방조제 건설과 간척사업으로 황금갯벌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염전과 갯벌을 잃은 주민들은 어업을 접고 벼농사 중심의 삶으로 전환해야 했다.

사라질 위기의 전통
과거 적서리는 뛰어난 단합력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면민체육대회에서도 종합우승을 한 마을이다. 현재 적서리에는 304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대호지면 12개 리 가운데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 그러나 주민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젊은 세대 유입은 적고, 고령화는 빠르 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송연덕 이장은 “적서리는 서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함께 돕고 음식을 나누며 살아가는 정이 깊은 마을이었다”며 “앞으로도 주민들이 서로 배려하고 화합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덧붙여 남기창 노인회장은 “좋은 자연환경의 혜택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적서리를 만들어갔으 면 한다”며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 겸손하고 베풀 줄 아는 마음, 서로 인사하고 관심을 나누는 공동체 문화가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